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세금을 많이 내면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반면 우리는 세금을 많이 내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 각종 불법 편법이 난무한다. 청문회 대상이 되는 공직자 후보들도 예외 없이 부동산거래에서 다운계약서를 작성하거나, 상속세 등을 납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탈세가 횡행하는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조세정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세정당국이 세금을 걷어야 할 대상을 빈틈없이 파악하지도 못하는데다, 세금부과에서 형평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담뱃값 인상에 이어 연말정산, 주민세ㆍ자동차세인상 취소, 건강보험료 개편 백지화 등의 파문이 일어나 국민들을 연신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이 바람에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는 연일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다. 파문이 일어난 원인은 정부와 청와대가 조세정책을 둘러싸고 오락가락한 탓이다. 어떤 것은 부자, 어떤 것은 빈자의 눈치를 보느라 우왕좌왕하다 벌어진 일이다.
조세와 관련해서는 꼭 지켜야 할 원칙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조세평등주의다. 조세는 국가 공공경비를 국민에게 강제로 배분하는 것으로 조세부담은 국민의 조세부담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건강증진이라는 미명하에 담뱃세를 인상한 것이 조세평등주의를 위반한 대표적 사례다. 담배는 주요 소비계층이 서민이다. 간접세는 징세가 편리하고 조세수입의 확보가 용이하다. 반면 누진이 아닌 비례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소득이 적은 자에게 상대적으로 조세부담률이 높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칙은 조세법률주의다. 그런데 연말정산 환급 소급적용은 명백히 이 원칙을 위배했다. 연말정산 방식 변경에 대해 국민들의 반발이 커지자 정부가 소급적용이라는 악수를 선택한 것이다.
정부가 불과 일주일 사이 세 차례나 조세관련 정책을 꺼냈다가 없던 일로 한 것은 유례가 없다. 그만큼 이들 정책의 휘발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박근혜 정부가 ‘증세 없는 무상복지’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공약을 폐기나 수정할 생각은 없는 상황에서 세금을 걷히지 않으니 이 같은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정부의 무상 시리즈 예산은 2012년 14조원에서 올해 27조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반대로 지난해에만 11조원의 세수가 결손이 발생했다. 세입과 세출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다. 무상복지를 줄이거나 증세를 하면 된다. 이미 여권 내에서도 이 같은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후보로 나선 유승민 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야, 정부 모두 증세 없는 복지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자. 중부담ㆍ중복지로 가야 하지만 현재 세금 부담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정책위 수석부의장 나성린 의원도 “중부담ㆍ중복지를 위한 국민적 논의가 있어야 한다”며 “박근혜식 증세는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정무권 연세대 글로벌행정학과 교수는 공저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에서 “박근혜 정부는 한편으로는 복지 확대와 보편적 복지를 강조하면서도 증세에는 반대하고 있다”며 “분명한 것은 복지개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방식이나 수준으로든 복지재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과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지출은 국가재정여력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IMF 경제위기 이후 실시된 구조조정으로 양극화와 빈곤이 심화되었고 가계부채는 더욱 증가했다. 이는 한국경제에 저성장기조를 불러왔고 증세를 위한 정치적 동원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증세도 무상복지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정치권이 증세와 복지 수준을 결정하는 일이다. 여당은 증세를, 여당은 무상복지를 부분적으로 맞교환 해야 한다.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길은 지루한 타협과 조정의 험난한 길이다. 이미 복지 선진국들이 경험했던 것들이다. 여야가 진영 논리를 깨지 못한 채 여전히 선거공약 수준의 프레임 속에 갇혀 싸움만 반복한다면 한국사회의 복지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조재우 논설위원 josus6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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