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 사진은 사과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어떤 글이나 말보다 무겁게 증거한다. 또한 사진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증명이다. 사진가가 실수로 혹은 의도적으로 배제한 테이블 아래 고양이는 존재를 부정당했다. 프레임 안과 밖을 단순히 크기로만 비교한다면 사진가의 작업은 증명보다 부정에 더 가깝다. 하나의 피사체를 위해 세상 만물을 부정하는 사진은 다른 어떤 예술보다 권력적이다.
‘사진 인문학’은 인문학자가 쓴 사진 속 철학 이야기다.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인 저자가 처음 사진을 찍은 것은 10여 년 전이다. 2002년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습 당시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로 있었던 저자는 아프간 난민 구호 차 현지를 방문해 보고용 사진을 찍었다. 일생에 다시 경험하지 못할 치열한 현장을 담은 사진 중 쓸 수 있는 게 한 장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저자는 그때부터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문학자 특유의 ‘질문병’ 때문에 저자는 아름다운 풍경 담기에 머무르지 못한다.
“멋진 사진, 좋은 사진이란 도대체 누가 규정한 것이고, 그렇게 규정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사진의 발명과 함께 발생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저 질문에 저자는 3년에 걸쳐 답변했다. 이 책은 2011년 3월부터 월간 ‘사진예술’에 3년 간 연재한 글을 묶은 것이다. 사진이 완전히 중립적일 것이라 믿었던 초기의 순진함부터 사진이 가진 무한한 권력에 경악하기까지, 저자는 사진의 의미ㆍ가치ㆍ힘의 변천사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추적한다.
발터 벤야민과 함께 사진 담론 발전에 중대하게 기여한 롤랑 바르트의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다. 사회의 제반 현상을 기호 작용으로 해석하려 했던 바르트의 사상 뒤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풍경 중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모든 명료한 것들을 부인하는 그의 생각은 사진의 개념 중 ‘풍크툼(punctum)’으로 이어진다.
풍크툼은 사진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 관계 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바르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수많은 사진 중 단 한 장도 자신이 사랑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지 못한 사실에 절망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다섯 살 무렵 찍은 사진에서 바르트는 가슴에 품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파편적이고 돌발적인 그 감정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기에 바르트는 그 사진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세상에서 단 한 명, 한 세대, 한 집단에게만 적용되는 아픔. 바르트는 그 아픔에 집중했고, 보편자를 위해 개별자가 희생해야 한다는 시대 분위기에 분노했다.
21세기 한국으로 배경을 옮겨보자. 사진가 정택용이 2006년 서울 외곽의 노동현장에서 촬영한 한 비정규 노동자의 모습은, 누군가에는 아픔이고 누군가에는 골칫덩어리다. 싸구려 아웃도어 조끼, 조악한 스테인리스 국그릇, 프레임에서 잘려나간 얼굴은 아무 말이 없지만 소외된 모든 이들의 가슴을 바늘처럼 관통한다. “그것이 풍크툼이다. 풍크툼, 그 은닉의 그리움이 이데올로기 담론의 홍수보다 훨씬 더 아프다. 사진이 갖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