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연습한 곡일수록 관성에 매몰되기 일쑤여서, 이때 여러 장치들을 동원해 ‘낯설게’ 인지하도록 돕기도 한다. 음악은 시간 순으로 흐르는 것이 순리이지만, 연습과정에 있어서는 그 속성을 일부러 해체하거나 교란시키곤 한다. A-B-C-D의 흐름을 갖는 악절이 있다면, D부터 시작해 C, B, A로 거슬러 올라간다. 순리대로 흐를 땐 관성에 매몰되기 일쑤지만, 역방향으로 거슬러 오르다 보면 음들의 인과관계를 새삼 생생히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A-B-C-D의 통상적 순서로 연습할 땐, A나 B등 앞부분만 정밀히 연습하다 지칠 때가 많다. 이는 수학정석을 제대로 공부해보겠다 맘 먹었다 해도, 첫 장인 ‘집합’만 죽어라 파고들다 다른 부분은 허투루 지나가는 것과 같았다. 이렇듯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역순으로 거슬러 가며 연습할 경우, 중요한 음악적 이정표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경유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래도록 머물러 탐닉할 수 있다는 점이 유용하다.
ABCD 전체의 규모를 한숨에 통째로 키우는 것 보다는 D면 D, C면 C 등 부분을 전체의 우주처럼 완성해, 퀼트 조각처럼 붙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때가 있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분을 ‘연결’하는 하이픈(-)의 완성도이다. 음악용어로는 이런 순간을 Episode, transition이라 일컫는다. ABCD의 각 부분이 기차의 객실이라면, 에피소드는 차량을 잇는 연결고리와 같다. 이 연결사슬이 부실하면 음악도 탈선한 기차처럼 와르르 전복될 위험이 있다.
내가 만들어내는 음색의 층위가 이토록 단조로운 것은 결국 청각적 상상력이 가난해서일 것이란 자책에 며칠 괴로웠다. 건반을 아무렇게나 누른 다음, 듣고자 하면 이미 늦다. 음을 만들기 이전부터 소리에 대한 상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혹 관현악곡의 풍부한 음색 채널을 접하면 초라한 상상력이 풍부해지지 않을까. 조바심 반 기대 반. 오케스트라 곡을 총보와 함께 감상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주자들이 늘상 접하는 악보는 오른손, 왼손 단 두 개 단으로 나뉘어져 있는 악보이다. 반면 이번에 집어 든 관현악 총보는 그의 열두 배 24단이다. 시야는 단박에 확장되지 않았다. 그간 2단에 갇혀 살던 우물 안의 개구리는 갈팡질팡 위태로이 갈지자를 그리며 음표를 쫓아간다.
반면 흥미로운 점들도 많았다. 우선 목관악기군과 현악기군 음색의 대조를 작곡가가 어떻게 적재적소의 지점에 배치했는지 그 의도를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같은 음높이, 똑같은 모양의 악절을 연주해도 악기 물성의 차이는 자못 매혹적이었다. 또한 음의 강세와 음량을 처리하는데 있어 각 성부의 ‘입체적’ 역할도 낯설고 새로웠다. 이를테면 각 성부에 여리고 여린 피아니시모가 표시되어 여리게 연주하더라도, 모든 악기군이 함께 연주하는 투티 부분의 다이나믹은 결과적으로 두터운 층위의 메조 포르테까지 도달해 버릴지 몰랐고, 모든 악기군이 크레센도로 출발하더라도 음량이 억센 관악기의 출발선은 현악기 뒤로 한참 물러나 있어야 음색의 밸런스가 얼추 맞는다.
일상의 가구처럼 음악을 마냥 배경으로 물러놓았을 때와 악보를 보며 집중해 들을 땐 경험치가 다르기 마련이다. 보물지도를 손에 얻었달까. 아무리 잘 알고 있던 곡이라도 귓등으로 흘려 감상하면, 주요 멜로디라는 기득권에 홀리고 말았을 것이다. 숨어있는 내성간의 갈등이라던가, 둔중한 베이스의 침착한 움직임이라던가, 툭툭 불거져 나오는 주요하지 않은 등장 인물들의 목소리를 올올이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20세기 대표적 작곡가 리게티가 남긴 악보를 보면 온갖 색깔과 수학적 기호들로 가득하다. 나 역시 악보 위 중요한 악절에는 색깔을 칠하거나 관심 있는 것들을 일일이 적어두곤 한다. 작곡 당시의 전기적 정보들이나, 작곡가가 음악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다른 연주자들은 어떻게 연주했는지 등등. 변화무쌍한 음악구조를 파악하다 보면 악보는 금세 지저분해지지만, 어느덧 그 음악에 관한 내 경험을 적어둔 총체적인 기록이 된다. 음악가들에게 악보는 물리적 자산과 같다. 영혼을 쉽게 오염시키는 다른 재화와 달리 정신을 건강히 살찌우는 것이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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