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열 살이 됐다. 커서 뭐가 될 거냐 물으면 “사람이 되겠다”던 아기가 이제 “십대가 되었다”며 으쓱해 한다.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 심사가 복잡해진다. 딸아이는 어떤 청소년으로 살아갈까. 사교육, 학교폭력, 입시지옥, 취업난, 삼포세대, 갑을관계 같은 단어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무시무시한 이 한국사회에서…. 아이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냐고 묻는다면 이 소녀가 생각난다. 원예사 리디아.
그림책에서 그냥 넘기기 쉬운 앞 면지(겉표지와 속표지 사이 두 페이지의 글씨 없는 공간)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채소와 꽃으로 가득한 정원에서 소녀와 할머니가 즐겁게 토마토를 따고 있다. 그러나 집 안으로 들어온 본문 첫 장에선 소녀도 할머니도 그렇게 슬픈 얼굴일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리디아는 아버지의 오랜 실직으로, 대도시에서 빵 가게를 하는 외삼촌 집에 얹혀살기 위해 홀로 떠나야 한다. 왕래가 없었던 외삼촌에게 리디아는 편지를 쓴다. “저는 작아도 힘이 세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거들어 드릴게요. 전 원예는 꽤 알지만 빵은 전혀 만들 줄 모릅니다. 하지만 빵 만드는 걸 굉장히 배우고 싶어요” 이 책의 글은 리디아가 가족에게 보낸 열두 편의 편지로만 이루어져 있다. 글은 주인공의 마음 속을 보여주고, 그림은 주인공의 마음 밖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챙겨준 꽃씨가 든 커다란 가방을 든 리디아는 낯선 기차역에 내린다. 온통 검은색인 기차역은 어찌나 크고 리디아는 어찌나 작아 보이는지.
“이 동네에는 집집마다 창 밖에 화분이 있어요! 마치 화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빈 화분들은 그저 삭막해 보이지만 리디아에게는 기다림을 견디게 해주는 빛이다. 리디아는 제빵을 배우고 화분에 꽃씨를 심는다. 꽃을 심기 시작하고 여덟 달이 지난 봄, 빵 가게에는 제법 손님이 많아졌다. 건물 옥상의 공터를 발견한 리디아는 잘 웃지 않는 외삼촌을 웃게 할 ‘음모’를 꾸민다. 여름이 되자 리디아는 외삼촌에게 깜짝 선물을 공개한다. 외삼촌은 놀란다. 쓰레기가 굴러다니던 옥상은 탐스러운 정원으로 변신했다. 몇 백 개는 되어 보이는 화분에 만발한 꽃과 채소. 그것들을 심고 가꾸면서 이 어린 소녀가 얼마나 가족을 그리워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다. 외삼촌은 일주일 뒤에 직접 만든 꽃 케이크를 선물하며 아빠가 취직했다고 전해준다. 떠나는 리디아를 껴안고 작별하는 외삼촌의 몸짓이 간절하다. 칙칙했던 기차역은 노란 빛으로 물들어 있다. 뒷 면지에는 원예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리디아와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할머니의 바구니엔 그 동안 리디아가 보낸 편지가 가득하다.
리디아는 가장 힘든 시절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견뎠고,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들까지 웃게 만들었다. 힘든 일들을 맞닥뜨릴 이 땅의 아이들이 이렇게 자랐으면 좋겠다. 그 긍정의 씨앗은 어디서 왔을까. 외삼촌에게 옥상 정원을 보여주기 전에 리디아는 이렇게 쓴다. “저는 엄마, 아빠, 할머니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신 아름다움을 다 담아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내 아이에게 무얼 바라기 전에 어떤 아름다움을 가르쳐 줬나. 부끄럽기만 하다.
김소연기자 au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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