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침을 열며] 증세와 꼼수의 갈림길에서

입력
2015.01.29 20:00
0 0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1990년대의 일이다. 1990년 10월 3일 통일 직후 독일 사회에서는 누가 통일의 수혜자인가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막 어학코스를 끝냈지만 전공용어를 완벽히 알아듣기에 벅찬 실력이었다. 그 주제를 놓고 벌어진 수업 시간 토론을 아무리 경청해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론과 제도를 거론하고 논박이 이뤄지고 설상가상 주제와 상관없는 이야기나 농담도 하는 듯하면 머리가 터지는 느낌이었다. 좌절 그 자체였다.

힘든 첫 학기의 나날을 보내다가 살던 동네의 사랑방 같은 선술집에서 우연히 마을 아저씨, 아주머니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떠듬떠듬 물어봤다. 통일 후 왜 서독 사람들은 동독 사람들이 더 이익을 본다고 이야기하는가? 그때부터 이 양반들이 연금, 의료보험, 실업급여 등 이야기를 쏟아놓는데, 수업 시간에 알아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자신들은 지금까지 연금보험료를 얼마를 내고 그 혜택으로 무엇을 받는데, 동독 사람들은 그 혜택을 통일이 됐다고 아무런 기여 없이 그냥 받는다라는 불평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체험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업시간 내용을 다시 이해하게 됐다.

지금 우리나라 선남선녀에게 연금이나 건강보험, 실업급여 이야기를 물어보면 1990년대 독일의 선남선녀들이 했던 이야기만큼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복지제도 자체를 일상으로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건강보험의 경우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부담을 실감한다. 그러나 여전히 본인 부담률이 높다. 그래서 건강보험료를 더 내고 혜택을 받는 길보다 민간보험을 선호한다. 건강보험료를 내 봤자 중병에 걸리는 결정적 순간에는 별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 여기에 증세 논쟁의 한계가 있다.

복지제도를 확대하려면 분명히 증세를 해야 한다. 효율적 예산 편성과 집행, 지하경제 양성화 등은 보조수단은 된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도 안 되는 복지 지출을 확대하기 위한 재정 조달의 주연은 증세가 해야 한다. 증세 없는 복지를 하겠다면 차라리 “국민 여러분께서 생각하는 것만큼은 복지제도를 확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선거 때 표 얻으려고 한 이야기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런데 증세를 통한 고부담-고복지 경험을 하지 못한 대중은 나중에 찾아올 ‘고복지’보다 당장 내 호주머니를 가볍게 할 고부담, 즉 증세에 저항한다. 낸 만큼 국가와 사회로부터 더 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 수준 자체가 낮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번 연말정산 대란에서 볼 수 있듯 “세액공제로의 전환은 증세 아니다”라고 꼼수를 부리면 그나마 낮은 신뢰 수준은 바닥을 향하게 된다. 세액공제로의 전환 자체가 직접 증세는 아니지만 간접 증세인 것은 경제학을 전공한 현 정부 경제팀 빼고 모든 국민이 다 아는 듯하다. 그런데 증세가 아니라고만 하니, 그러면 지금 내가 더 많이 내는 세금은 결국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의구심만 증폭된다.

당시 우연히 마주쳤던 독일인들은 불만을 이야기했지만 높은 수준의 세금과 사회보험료의 필요성도 함께 인정했다. 실업자가 되고 병원에 입원하며 사고를 당했을 때 그리고 늙어도 자신이 이룩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연금, 의료비 지원, 실업급여, 사회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보편복지의 실체다. 평소에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지만 그 힘이 어쩔 수 없이 모자라게 될 때 필요한 도움을 국가가 언제든 줄 수 있다는 신뢰가 있었다. 국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충분한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맡겨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세액공제로의 개편도 증세라고 솔직히 인정하라. 증세가 아니라고 부리는 꼼수에 넘어갈 만큼 대중은 어리석지 않다. 이런 것 몇 번 겪으면 다음 선거 때 내세우는 복지공약에 다시는 속지 않는다. 복제제도 확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함을 인정하라. 단, 내가 낸 세금을 국가가 복지로서 나에게 돌려준다는 확신, 나보다 더 세금 납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내고 있다는 조세정의에 관한 믿음을 줘라. 아니라면 보편복지 확대 포기를 선언하라. 그게 더 솔직하고 지도자다운 모습이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