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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점수 인플레 사회

입력
2015.01.2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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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있을 때다. 과제물을 본 강사가 불렀다. 몸을 꼬게 만들 과찬을 했고 고득점을 암시했다. 기대에 들떴다. 며칠 뒤 점수를 확인했다. 70점대 초반이었다. 100점 만점 기준이었다. 배신감이 느껴졌다. 놀림 당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에서는 잘했다 해놓고선 꼴랑 70점대를 주다니…’

강사의 ‘진심’을 곧 알게 됐다. 영국에서 70점대는 높은 점수대다. 75점 이상은 ‘탁월함’(Distinction)으로 분류된다. 영국식 A+라 할 수 있다. 영국인 친구는 “대학시절 75점 이상은 꿈의 점수였다”고 말했다. 야박한 평가는 성적 하위권에 더 잔인하게 적용된다. 보통 50점이 낙제 기준인데 20점, 10점을 받는 학생도 간혹 있다. 40점 정도를 주며 점잖게 낙제를 알리는 게 아니라 해당 학생의 실력을 명확히 판단해준다. 일종의 채찍이다. 영국에서 온정이 넘치는 학점은 없다. 학점에 대한 신뢰도는 높다. 고지식함이란 경쟁력이 쇠락한 제국을 지탱한다.

한국은 어떨까. 잘 알듯이 고학점이 넘친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 김회선 새누리당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대 재학생 51.8%가 전공과목에서 A학점 이상을 받았다. 다른 대학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포항공과대는 49.8%다. A를 받아도 중상위권 정도의 성적이다. 학점 인플레다. 학점의 변별력이 떨어지니 학생들은 다른 ‘스펙’에 공을 들인다. 토익 점수로도 우열을 판가름하기 어려우니까 대외 활동 등 ‘경력 관리’에 나선다. 결국 외모까지 주요 경쟁력이 됐다. 대학이 책임을 놓은 결과다.

교육부가 ‘학점 인플레 대학’에 재정지원을 축소하고 입학정원도 줄이겠다고 압박하자 한 대학이 ‘학점 낮추기’에 나섰고 학생들은 반발했다. 몇 년 전 시험 중 부정행위를 단속하지 말라며 시위를 벌이던 방글라데시 학생들의 모습이 포개졌다.

얼마 전 인터넷을 수리했다. 수리 기사가 왔다간 다음날 전화를 했다. “본사에서 만족도 조사할 때 꼭 10점을 말해달라”고 통사정했다. “8점 정도를 한번 받으면 근무 평점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했다. “대부분 10점을 받기에 그렇다”고 설명했다. 고객들의 후한 인심이 되레 수리 기사의 목을 죈 꼴이다. ‘인심 좋은 사회’의 일그러진 군상이다.

인천 송도 어린이집 사건에서는 ‘평점 인플레’가 ‘공범’이다. 송도 어린이집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평가 인증 점수는 95.36점이었다. 100점 만점에 받은 점수이니 최상위 어린이집이라 착각할 수 있다.

지난해 국감 때 새정치민주연합 남윤인순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전국 어린이집 중 평가 인증 점수를 95점 이상 받은 곳은 41.5%였다. 송도 어린이집은 특별히 우수한 곳이 아닌 평범한 어린이집이었던 셈이다. 90~95점 미만을 받은 어린이집이 38.5%이니 90점 이상 어린이집이 80%나 된다. 점수 인심이 후해도 너무 후하다. 부모 입장에선 평가 인증 점수가 어린이집 선택에 있어 유용한 기준이 못 된다.

복지부가 인간미 넘치는 점수를 남발할 때 부모들의 어린이집 선택 기준은 부실해졌다. 정부의 관리ㆍ감독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셈이다. 건물감리사가 부실공사에 합격 판정을 해준 것과 다르지 않다. 보육의 틀이 무너진 데는 교사 개개인보다 정부의 탓이 더 크다.

정부는 어린이집 폐쇄회로(CC)TV 설치 의무화와 보육교사 자격증의 국가고시화 추진을 대책으로 내놓고 있다. CCTV가 제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보육의 질을 담보하지 못한다. 오심을 줄이기 위해 비디오 판독을 도입해도 축구 심판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엄격한 평가의 틀이 준비되지 않으면 국가고시도 ‘무늬’ 변화에 그친 수준이 된다. 정부가 ‘심판’으로서의 자격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냉정한 점검이 우선이다. CCTV와 국가고시 뒤로 숨는 모양새는 비겁하다. 진정한 경쟁력 강화는 노력과 성과에 대한 공적 기관의 올바른 평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라제기 국제부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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