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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향기, 배합의 묘로 소비자의 코를 유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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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향기, 배합의 묘로 소비자의 코를 유혹하라

입력
2015.01.2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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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향 세안제로 화장 말끔히 지우고

신제품 사용 후 평가지에 점수 매겨

천연ㆍ합성향료 배합 무궁무진

향수 신제품 1년에 600종 출시

아모레퍼시픽 향료연구팀 연구원들이 식물에서 향 성분을 추출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퍼시픽 향료연구팀 연구원들이 식물에서 향 성분을 추출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천로에 있는 화장품기업 아모레퍼시픽의 ‘프래그런스 랩(Fragrance lab)’. 이곳에선 아모레퍼시픽이 새로 개발한 에센스 제품 3가지에 대한 품평이 진행됐다. 신제품의 명운을 가를 품평자는 소비자다. 그런데 단순히 화장품에 관심 있는 소비자가 아니라 남들보다 향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특별한 소비자에게만 품평할 자격이 주어진다.

아모레퍼시픽의 제안으로 품평에 직접 참여했다. 3가지 에센스가 품은 향은 분명 각각 달랐다. 하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정확히 구별하거나 오래 기억하거나 말로 표현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후각이 남달리 예민한 사람들이 화장품기업에겐 보배 같은 존재인 이유다.

신제품 향 품평 직접 해보니…

이날 품평실에서 만난 ‘특별한’ 소비자는 생명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20대 후반 여학생이다. 1년째 아모레퍼시픽 품평에 참여하고 있는데, 조향사가 인정할 만큼 후각이 뛰어나다. 그는 “처음 향수를 선물 받은 뒤부터 향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 조향학원을 다니며 공부했고, 향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품평에 참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학생처럼 아모레퍼시픽의 향 품평에 참여하는 사외패널은 남녀노소 140명. 사내패널 60명까지 치면 200명의 꼼꼼한 ‘심사’를 거쳐 신제품들의 향이 결정된다.

이들은 아모레퍼시픽이 자체 개발한 후각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이다. 냄새를 전혀 못 맡는 완전취맹은 드물지만, 특정 냄새에 둔감한 부분취맹은 꽤 많다. 한국과 일본에는 머스크(사향노루)향 취맹이 흔하다. 이런 사람은 테스트를 통과 못한다. 선발된 패널들이 품평을 진행하는 공간도 특별하다. 다른 냄새에 방해 받지 않도록 환기시스템이 계속 가동되고, 품평 중 필요한 세제나 세안제, 샴푸 등은 모두 무향 제품으로 특수 제작됐다.

이런 특수 공간에서 품평이 시작됐다. 먼저 무향 세안제로 화장을 말끔히 지우고 신제품 에센스를 바르며 향을 평가한 다음, 10분 지나서 남아 있는 향을 다시 확인했다. 바른 직후와 10분 뒤의 향의 강도와 지속 정도, 선호도 등에 대해 점수를 매기고, 평가지에 제시된 형용사들과 향의 이미지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수치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무형의 향에서 받은 느낌을 언어로 구체화하는 게 가장 난감했다. 처음 접한 향이 순수한지 매혹적인지, 상쾌한지 섬세한지, 여성적인지 남성적인지를 가려내라고 요구한다.

향수 생존경쟁률 200~300:1

아모레퍼시픽 향료연구팀이 새로 개발하는 향은 연 수백 가지에 달한다. 이 중 조향사와 마케터, 소비자의 엄격한 품평을 거쳐 최종 선택된 향만 제품에 담긴다. 이들을 사로잡지 못한 향은 버려질 수밖에 없다. 아모레퍼시픽 조향사 전병배 마스터는 “세계에서 출시되는 향수 신제품이 1년에 약 600종인데, 이 중 5년 뒤 시장에서 살아남는 건 두세 종뿐”이라고 말했다.

조향 기술은 한 마디로 ‘배합의 묘’다. 가령 장미향 하나를 제조할 때도 20가지가 넘는 향 성분이 들어간다. 이들을 어떤 비율로 섞느냐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장미향이 만들어진다. 각 성분의 비율을 미묘하고 섬세하게 조절해 까다로운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 바로 조향사의 능력이다. 자연에서 얻는 향료와 인공적으로 만드는 합성향료를 모두 합치면 수천 가지에 달한다. 이 중 화장품을 비롯한 생활용품 제조에 흔히 쓰이는 천연향료는 200여종, 합성향료는 2,000여종 정도다. 이들만 배합해도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다 만든 향 성분을 에센스나 방향제 같은 제품에 넣는 것 역시 배합 싸움이다. 향 성분은 대부분 기름이라 다른 수성(水性) 물질과 섞으려면 계면활성제가 필요하다. 유성과 수성 성분, 계면활성제를 적절히 조합해 향이 잘 살면서 제품의 기능까지 최적화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LG생활건강 이지민 책임조향사는 “비누나 화장품, 향수의 원료에 따라 같은 향 성분을 넣어도 실제 향이 다르게 발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벨상 받긴 했는데…

생활용품 원가에서 향 성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가까이나 된다. 조향 기술의 경제적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향이 판매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향수는 더하다. 전 마스터는 “향수에 쓰이는 향료 가격이 비누에 들어가는 향료보다 평균 5배는 비싸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향을 내는 성분이라도 향수에는 합성이 아닌 천연향료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향을 다루는 기업에서 조향사의 책임이 막중할 수밖에 없다.

조향사를 비롯 일부 사람들만 왜 유독 향에 민감한지는 아직 수수께끼다. 유전된 능력인지 환경의 영향인지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다만 훈련을 통해 후각의 민감도를 높일 수 있다는 데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후각 능력이 미스터리인 이유는 사람이 냄새를 인지하는 메커니즘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냄새 분자가 콧속 후각수용체에 달라붙으면 수용체의 구조가 바뀌고 이 신호가 신경을 따라 뇌로 전달돼 무슨 냄새인지 알게 된다는 게 유력한 이론이다. 냄새 분자의 모양에 따라 반응하는 수용체의 종류와 수가 달라 서로 다른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는 이 ‘수용체 이론’은 2004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머스크향은 수용체 이론으로 설명이 안 된다. 머스크향 분자들은 모양이 제각각이지만 냄새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는 분자를 이루는 원자들의 진동수가 서로 다른 냄새를 만들어낸다는 ‘진동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진동 이론은 멘톨향을 설명 못한다. 구성 원자는 같지만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구조의 두 멘톨(D-멘톨, L-멘톨) 성분은 진동수는 같지만 향이 다르다. 노벨상 결과가 뒤집힐 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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