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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순수문학’ 앞세워 과거로 가는 정부

입력
2015.01.2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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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생명은 저항과 불온에서 비롯돼

우수도서 기준은 70년대식 통제와 감시

순수문학 외쳤던 사람들 순수하지 못해

노벨문학상 후보를 거론할 때 한국 문인으로 가장 자주 이름이 오르는 이가 바로 고은 시인이다. 그는 파란만장한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껴안았고 그때 품었던 비장하고 격렬한 의지를 시로 표현해 독자의 마음도 불타게 했다. 비록 번번이 수상에 실패해 조금 민망해졌지만 그래도 그가 해마다 수상자 후보로 언급되는 것은 바로 그의 시가 지닌 저항의 정신 때문이다.

그러나 고은의 시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0대 후반 한국전쟁을 겪은 그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목숨마저 끊으려 했다. 죽음과 삶의 문제로 고민하던 그는 효봉 스님 밑에서 이후 10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한 다음 1962년 다시 속세로 나왔다. 불가에 있을 당시 고은은 때때로 시를 썼는데 거기에는 자신의 고민을 복제한 것 같은 허무와 절망이 가득했다. 속세로 돌아온 고은은 1960년대 말까지 거의 매일 무교동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전쟁의 정신적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그가 술에 기댄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술을 마셔대던 어느 날 그는 술집에서 한 죽음을 접한다. 1970년 11월, 바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읽은 것이다. 고은은 청년 전태일의 분신을 놓고 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고민하다가 그날 이후 거리로 뛰쳐나갔다. 고은은 “그때까지만 해도 현실참여적인 시를 쓰는 사람을 바보처럼 여겼다”고 했으니 전태일의 죽음이 세상을 보는 그의 인식과 시 세계를 송두리째 바꾼 것이다.

고은은 그 뒤 박정희 정권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에 맞서며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온 몸으로 가자…/가서는 돌아오지 말자/박혀서/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화살’)며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문단은 고은이 실존과 허무에 계속 머물면서 사회 현실에 눈을 감았더라면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릴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은의 시가 아니라도 문학은 저항이 생명이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그것에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살아있는 예술이 된다. 반대로 현실에 안주하고 그것을 즐기는 예술에서는 긴장도, 창의적 상상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1960년대 시인 김수영이 일찍이 시는 불온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같은 저항과 불온의 정신을 지금 정부가 거세하려 하고 있다. 우수문학도서의 선정 기준에 ‘특정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 작품’을 포함시킨 것은 그것이 단순한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문학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정부가 ‘순수문학’을 실무적 검토 표현이라며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그것을 부인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문학이, 누구나 좋아하는 순수라는 단어를 앞세운 적이 있기는 있다. 해방 이후,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순수문학을 외치던 이들이 문단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친일 활동을 하거나 권력에 빌붙었으니 그들 입에서 나온 순수문학은 결코 순수할 수 없었다. 그 순수문학이라는 용어는 억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1980년대를 거치며 사실상 소멸했고 이제는 보수적인 문인조차도 좋은 문학, 그렇지 않은 문학으로 나눌 뿐 섣불리 순수문학을 말하지 않는다. 한국 문학에서 지금껏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은 대부분 불의에 맞서거나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고 성찰한 것들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갑자기 순수문학을 들고 나온 것은, 암흑 같았던 1970년대의 기준을 되살려 통제와 감시를 하겠다는 발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문인들은 입을 모은다. 거기에 재미동포 작가 신은미씨의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가 2013년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된 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부가 문학판과 영화판을 좌파가 장악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번 일은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사퇴 요구와 함께 정부의 그 같은 인식을 입증한 결정적 증거다.

냉소적으로 보자면, 유권자가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은 바로 그 순간 한국 사회는 1970년대로 회귀하는 길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일은 그것을 실행하려는 구체적 움직임이다. 세상을 그 시대로 되돌리고자 하는 그들에게는 문화가 불온하거나 저항적이거나 혼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그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저항과 불온이 사라진 순종적 사회다. 그런 세상을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박광희 부국장 겸 문화부장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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