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근본주의자 슈틸리케는 배고플 뿐이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근본주의자 슈틸리케는 배고플 뿐이다

입력
2015.01.28 14:09
0 0

원리·원칙 어긋나면 격분…'오케스트라' 완성 위해 마지막 불꽃

2015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준결승 이라크와의 경기를 하루 앞둔 한국 축구대표팀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25일 호주 시드니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5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준결승 이라크와의 경기를 하루 앞둔 한국 축구대표팀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25일 호주 시드니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5 호주 아시안컵에 나선 한국 축구 대표팀은 내용보다 결과가 좋았다.

지난 26일 이라크와의 준결승전까지 이번 대회 5경기에서 모두 무실점했고 결과는 전승이었다.

아찔한 위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실점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전체 슈팅 가운데 골로 이어진 슈팅의 비율은 14%로 대회에 참가한 16개국 가운데 8위에 머물렀다.

결정적 찬스를 만들어내는 횟수도 적었지만 고비마다 값진 골이 터져 경기는 승리로 끝났다.

대표팀은 매일 승전가를 부르고 울리 슈틸리케(61·독일) 한국 감독은 '실용주의의 화신'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의 얼굴 한편에는 "이건 아닌데…"라는 듯한 불만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사실이다.

결국 그는 이라크와의 준결승전이 끝난 뒤 우승을 향한 길이 열렸다는 말에 폭발했다.

슈틸리케 감독이 "한국은 우승해도 더 노력해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이는 승리에 취한 이들에게는 동문서답으로 들릴 뿐이었다.

◇ 축구인생의 장엄한 마지막 불꽃 = 대회 초반에 중국 기자들이 슈틸리케 감독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한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놓으면 중국으로 건너와 지도자 생활을 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중국 구단들은 일확천금일 수 있는 파격적 연봉으로 명장들을 영입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내 나이가 몇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느냐"며 "한국 사령탑은 내 인생의 마지막 감독직"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한국 감독직을 자신의 축구인생 마지막을 성대하게 불태울 기회로 삼고 있는 게 틀림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세계 최고의 명문구단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와 영원한 월드컵 우승후보 독일 대표팀에서 선수로 찬란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영예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상대적으로 초라한 세월을 지냈다.

한 방송 해설가는 "슈틸리케 감독이 지도자 생활 전반에서 승리에 익숙하지 않은 감독"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패자의 처지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도자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한국의 연승과 국민적 찬사는 슈틸리케 감독에게 생소한 일일 수도 있다.

슈틸리케 감독이 한국 대표팀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지도자 생활에서 한이 맺힌 승리의 갈증을 푸는 것일까.

승리가 만사형통이라고 믿거나, 실체가 불분명하지만 신비주의적이고 호감이 가는 '실용주의'라는 찬사를 즐기는 것은 아닐까.

◇ 우세 때도 이길 때도 갑자기 격분 = 그간 슈틸리케 감독의 행동을 보면 결과만 좇고 그에 안주하는 인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경기 중 우세 때도 역정을 내거나 승리해도 울분을 토하는 모습을 보면 실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이는 아닌 것으로 비친다.

슈틸리케 감독은 호주에 건너온 뒤 '한국 축구의 버릇을 뜯어고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 선수들의 무의식에 또아리를 튼 소극적이고 뒤로 물러서는 태도가 멀쩡한 기술과 체력을 좀먹는다고 봤다.

슈틸리케 감독은 패스가 이유없이 옆이나 뒤로 갈 때면 팔을 휘저으며 불호령을 내렸다.

스코어에 여유가 있고 전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도 재미없고 느린 경기를 보면 한숨을 내쉬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불만스러운 말도 속출했다.

"지거나 무승부로 끝날 경기였다", "운이 좋아서 이겼다", "우승후보의 자격이 없다", "기술은 모르겠으나 투지 때문에 선수들을 칭찬할 수밖에 없다", "우승해도 한참 더 배워야 한다" 등등.

모두 무실점으로 이긴 뒤에 나온 말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이 실리를 목표로 한다면 최고의 가치인 승리를 챙겼음에도 계속 쓴소리를 되풀이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 철칙을 제시하는 근본주의자 = 슈틸리케 감독이 아시안컵을 위해 호주에 온 뒤 가장 많이 사용한 축구 용어는 점유율이었다.

경기 때마다 훈련 때마다 강조하는 말을 들어보면 높은 볼 점유율이 최우선으로 지킬 원칙임이 틀림없다.

"높은 점유율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횡패스나 백패스를 남발하는 방식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볼을 소유하며 끊임없이 전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를 원한다."

이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뿐만 아니라 골키퍼에게까지 적용되는 슈틸리케의 원리로서 그라운드에서는 여러 철칙으로 구체화한다.

볼을 자주 빼앗기는 자는 슈틸리케의 선택에서 멀어진다.

이근호(엘 자이시)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최전방 공격수 1순위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는 지난 4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평가전에 선발로 나왔다가 볼을 간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10일 오만과의 아시안컵 1차전에서 이근호를 배제한 뒤 "볼 키핑을 못해서 뺐다"고 직설적으로 타박했다.

질 좋은 점유율 축구를 위해 공격수는 볼 점유의 마지막을 반드시 슈팅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점유율 상승이 슈팅의 증가와 비례하지 않을 때 슈틸리케 감독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관측된다.

스트라이커 이정협(상주 상무)은 슈팅 기회 때 허무한 크로스를 날렸다가 분노를 산 적이 있다.

공격적 점유율을 위해 미드필더는 두 말이 필요 없고 수비수들도 공을 앞으로 운반하는 데 적극 가담해야 한다.

심지어 골키퍼까지도 볼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한 명의 필드 플레이어로서 적극적 점유율을 위한 패스 플레이의 한 축을 맡아야 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런 철칙에서 어긋나는 롱볼 플레이, 안일한 볼 관리의 조짐이 보일 때 불같이 화를 내거나 분을 억지로 삭이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선수들의 몸 상태에도 철칙이 있다. 컨디션이 100%인 선수만 출전할 수 있으며 90%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이를 두고 "다른 감독들보다 더 강력한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벤치행이 컨디션 난조를 겪는 선수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자기 관리가 완벽하지 않은 선수들에 대한 징벌에 가깝다는 설명이었다.

선수와의 의리, 친소관계에 따른 기용을 끔찍하게 경계하는 것도 슈틸리케 감독의 원칙 가운데 하나다.

그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수비진이 자주 바뀌는 원인을 묻는 한 한국 기자에게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라"며 갑자기 화를 낸 적이 있다.

격분할 질문이 아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를 나중에 물어보니 선수와 기자의 유착을 의심했다는 취지의 해명을 내놓았다.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 내용보다 누가 출전할지에 더 신경을 쓰는 분위기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친분이 있는 선수의 출전을 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 원리·원칙의 지향점은 '오케스트라' = 자신의 축구인생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울 원리·원칙이 추구하는 그림은 무엇일까.

슈틸리케 감독은 잠시 심심풀이로 봤다가 나중에 결과로만 기억되는 축구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축구를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취임 무렵 기자회견 때 꺼낸 이런 말을 자주 되풀이한다.

"또 얘기하지만, 텔레비전에서 그냥 그런가 보다 그러면서 보는 축구가 아니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있는 축구를 지휘하고 싶다."

슈틸리케 감독은 축구 대표팀을 오케스트라, 축구 경기를 음악 공연에 비유하며 자신이 꿈꾸는 축구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선수가 지휘자가 될 수도 악기 연주자가 될 수도 있지만 전체의 조화로운 행위가 관중을 즐겁게 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 의무"라고 말했다.

이기더라도 내용이 좋지 않으면 슈틸리케 감독이 진 것보다 더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런 지론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도 넋을 놓고 앉아서 대표팀의 경기를 감상하는 경지가 오기만을 고대한다는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지난 4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평가전을 앞두고 "이번뿐만 아니라 다른 경기에서도 벤치에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최근에도 비슷한 맥락인 듯 연주자나 지휘자 역할에 미숙한 선수들에 대한 한없는 걱정을 쏟아내기도 했다.

기성용(스완지시티), 차두리(FC서울)와 같은 선수가 볼을 잡으면 아무 얘기도 없이 지켜볼 수 있어서 즐겁다고 했다.

그러나 경험이 적은 선수들이 볼을 잡을 때는 벤치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슈틸리케의 원리·원칙이 플레이로 구체화돼 멋진 공연처럼 펼쳐지는 때가 언제 올지는 지켜볼 일이다.

일단 그 첫 단추는 잘 끼워지는 듯하다. 슈틸리케 감독은 '아시아의 우물'을 벗어나는 것을 올해의 목표로 삼았다.

아시아 1위 이란, 2위 일본이 모두 탈락한 가운데 한국은 아시안컵 결승에 진출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결승행이 확정된 뒤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하며 자만할 단계와 멀어질 계기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차 목표 하나를 달성했으니 더 나은 무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세계무대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강호 스페인, 독일을 거론한다. 그가 떠나기 전에 한국이 스페인, 독일에도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상대로 성장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연합뉴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