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人質)이라는 용어에 대부분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만 전쟁이 일상화된 고대사회에서는 전쟁을 예방하는 긍정적 기능도 있었다. 인질은 질자(質子)ㆍ유질(留質)이라고도 하는데, 역사상 유명한 인질은 진 시황(秦始皇)의 아버지 진(秦) 장양왕(莊襄王)이다. 진(秦)나라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의 둘째 아들로 성은 영(?), 이름은 이인(異人)이고 어머니는 하희(夏姬)였다. 사기(史記) ‘여불위(呂不韋) 열전’에 따르면 안국군에게는 아들이 20여명이 있었는데, 어머니 하희나 영이인은 별로 총애를 받지 못해서 조(趙)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다. 그 후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는 바람에 형편은 더욱 곤궁해졌다. 이때 한단(邯鄲)에 장사하러 온 여불위가 영이인을 보고 “이것은 진귀한 물건(奇貨)이니 사둘만 하다”라고 말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여불위는 1,000금을 써서 영이인을 효문왕(孝文王ㆍ안국군)의 왕후 화양부인(華陽夫人)과 가깝게 만들고 다시 황금 600금을 써서 진나라로 탈출시켰다. 전국책에는 영이인이 조나라에서 돌아오자 여불위가 초(楚)나라 옷을 입고 왕후 화양부인을 만나게 했는데 왕후가 기뻐하면서, “나는 초(楚)나라 사람이니 너(子)를 사랑한다”라며 이름을 ‘자초(子楚)’라고 바꾸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자초는 화양부인의 후원을 얻어 다른 왕자들을 물리치고 즉위했으니 그가 장양왕(莊襄王ㆍ재위 서기전 250~247)이었다. 인질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하고 그 아들은 전국(戰國)을 통일했으니 인생유전(人生流轉)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한국사에도 인질은 여럿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박제상과 관련된 신라의 인질들이다. 삼국사기는 박제상을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지만 삼국유사와 화랑세기는 김씨라고 달리 적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은 왜국에,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 눌지왕이 즉위 후 두 동생을 그리워하자 박제상은 고구려에 가서 “이웃 나라를 사귀는 도리는 성신으로 할 뿐”이라고 설득해 복호를 데려왔다. 박제상은 다시 신라의 적국이었던 왜국으로 건너가서 미사흔에게 몰래 귀국하라고 권했다. 미사흔은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드는 데 어찌 저 혼자만 돌아가겠습니까?”라고 거절했다. 박제상은 계속 설득했고 삼국사기 ‘박제상 열전’은 “미사흔이 박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하직하고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안 왜국왕은 박제상을 목도(木島)로 귀양 보냈다가 불에 태워 죽인 후 목을 베었다. 미사흔이 돌아오자 눌지왕은 6부 사람들에게 멀리까지 나가서 맞이하게 하고 형제들을 모아 크게 술자리를 베풀면서 스스로 노래를 지어서 춤을 추며 불렀는데 눌지왕이 지은 무가(舞歌)가 향악(鄕樂) ‘우식곡(憂息曲)’이다. ‘근심이 그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고려사 ‘고종 28년(1241) 4월조에는 “족자(族子) 영녕공(永寧公) 왕준(王?)을 (고종의) 아들이라고 칭하고, 의관(衣冠ㆍ벼슬아치) 자제 10명을 거느리고 몽골에 들어가 툴루게(禿魯花)가 되게 했다”는 구절이 있다. 툴루게(禿魯花)에 대해서 고려사는 “몽골어로 질자(質子ㆍ인질)를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왕준은 이후 고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무사했으며 계속 원나라에 거주하면서 충렬왕이 원나라에 오면 두 아들을 데리고 알현하는 것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인질제도는 국내정치에서도 시행되었는데 신라에서 지방 호족(豪族)의 자제들을 서울에 살게 했던 상수리(上守吏)제도나 고려의 기인(其人)제도 등이 모두 이런 종류의 제도이다.
인질을 교환하는 것을 교질(交質)이라고 한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은공(隱公) 8년 7월조에는 “송(宋)나라 군주인 공작과 제(齊)나라 군주인 후작과 위(衛)나라 군주인 후작이 와옥(瓦屋)에서 동맹을 맺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희생을 잡아 맹서하고 인질을 교환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춘추곡량전의 저자인 곡량자(穀梁子)는 “고저(誥誓ㆍ하늘에 고유하는 것)는 오제(五帝)만 못하고, 맹저(盟詛ㆍ희생의 피를 나누며 약속하는 것)는 삼왕(三王)만 못하고, 교질(交質)은 이백(二伯)만 못했다”고 박하게 평가하고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 3년조에는 “믿음 가운데 이루어지 않으면 인질은 유익함이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인질은 왕족이나 지배층 사이에서 우호를 다지고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제도였다. 지금처럼 정치와 직접 관련이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을 잡아다 돈을 요구하고, 수감자와 맞교환을 요구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악해졌음을 뜻한다. 서방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이 아니라 돈이 지배하는 문제 많은 사회지만 이에 맞서는 이슬람사회가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는 식으로 목적을 이루리란 생각도 전혀 들지 않는다.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 것은 만고의 진리였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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