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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백년의 고독과 SNS

입력
2015.01.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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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똑같아. 처음에는 잘들 자라고, 말 잘 듣고, 예의 바르고,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일 것 같던 애들이 그저 수염만 나기 시작하면 죄다 못된 짓을 한다니까.” 우르술라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창녀촌에 들락거리고, 당구나 치면서 허송세월하는 아우렐리아노 호세를 보면서 한탄한다. 호세는 자신을 양아들로 키워준 고모 아마란타와 결혼하겠다고 덤벼들다가 거부당한 후 빗나간다. “넌 짐승 같은 놈이야. 돼지꼬리가 달린 애들이 태어날 거란 말이야.”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서 돼지꼬리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근친상간의 금기를 상징한다. 금기는 문명의 진보가 시작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금기는 주체할 수 없는 원초적 욕망이기도 하고, 문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파괴와 창조, 삶과 죽음의 이중적 상징을 구현한다. 우르술라와 아마란타는 호세의 창조적 본능과 삶에 대한 열정은 보지 못하고 파괴적 본능과 죽음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만 보았다. 호세는 스페인 극단이 공연하는 ‘여우의 단검’이라는 연극을 보러 갔다가 몸수색을 실시하는 리카르도 대위와 부닥친다. ‘여우의 단검’은 자유주의 성향의 연극이다. 호세는 대위에게 말한다. “함부로 행동하지 마시오, 대위. 지금까지 내 몸에 손을 댄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소.” 호세는 부당하게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 의연하게 대응한다. 대위는 호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 그를 즉사시킨다. 자유가 말살된다. 대위의 총부리는 폐쇄, 탄압, 테러 등의 다양한 형태로 현대 문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호세가 쓰러진 후 대위도 쓰러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두 발의 탄환을 맞고 쓰러진다. 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든다. 4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극장 앞으로 지나가면서 리카르도 대위의 시체에 권총을 쏘아댄다. 자유를 배제한 권력의 야만성은 고독한 군중들의 또 다른 야만성을 부른다. 근대화 이후 야만성의 긴장과 갈등은 문화, 종교, 언론 등 비정치적 영역으로 확장된다. 억압당한 야만성은 광신적 종교집단이나 극단적 테러단체에 대한 동경과 갈망으로 분출되기도 하고, 사회 곳곳에서 삑사리를 낸다. 삑사리를 낸 군중은 당구장에서, PC방에서, SNS에서 고독한 표정을 짓는다.

톰 소여도 고독한 군중이다. 그도 호세와 같은 연애박사고 사고뭉치다. 동네에서는 깡패다. 설교 시간에는 딱정벌레를 풀어서 교회를 웃음바다로 만든다. 그에게도 우르술라와 아마란타 같은 엄격함과 규율을 강요하는 폴리 이모가 있다. 그러나 그의 모험은 사회적 금기를 창조적 삶과 욕망으로 개선시킨다. 뗏목과 동굴은 금기를 거스르는 용기다. 그가 획득하는 보물 상자는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악당들이 감춘 것을 찾아낸 것이지만 그저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정의에 합당하다. 톰 소여의 뗏목은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뗏목의 재료를 발견한 미시시피 강이나 활을 쏘면서 자유를 체험한 셔우드 숲은 환경적 산물이다. 사회적 자원이고, 국가의 재산이다. 우르술라와 아마란타가 금기를 향한 호세의 반대편 욕망을 주의 깊게 봤더라면 호세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권위적 부모는 호세의 파괴적 본능을 보고서 계정을 폐쇄하고, 폰을 망치로 부숴버린다. 민주적 부모는 아이들의 다른 면을 본다. 스스로 계정을 만들어 아이들과 소통하고, 폰의 버전을 향상시켜 준다. 동굴에 대한 공포로 그 입구를 막기에만 급급하면 아이들의 잠재력을 죽일 뿐이다. 그렇다고 원초적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욕망의 눈이라는 호기심만 더욱 키울 뿐이다. “아이들의 과오는 아버지의 탓이다. 사회는 스스로 만들어낸 암흑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마음속에 그늘이 가득 차 있으면 거기에서 죄가 범해진다. 죄인은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 그늘을 만든 자다.”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박영규 중부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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