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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털터리·이혼·자살충동…이젠 10억 매출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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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털터리·이혼·자살충동…이젠 10억 매출 기업

입력
2015.01.2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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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나이만큼 새해를 맞는다. 나이를 더할수록 새해를 맞는 기쁨과 설렘이 무뎌지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한다. 그것만은 아니다. 긴 불황 국면을 거치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굳고 어두워 보인다. 팍팍한 마음들이 팍팍한 경제를 만든다. 불안한 마음들이 불안한 경제를 만든다. 우리가 불안한 것은 좀 많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바닥이라면 불안할 것도 없다.

정도로 돌아가자. 지름길은 없다. ‘사는 게 어렵다, 어렵다’지만 올해도 사랑의 온도계는 곳곳에서 100℃로 끓고 있다. 소비지수가 높은 우리 지역의 온도가 낮은 것은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면 불안은 사라진다.

여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삶을 꽃피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 한 장의 차이로 무언가를 해낸 사람들이다. 그 한 장의 차이로 행복해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겐 응원가다. 아직 괜찮다는 희망의 증거들이다. 좋은 일 하나 만들 때는 오늘, 올해다. 편집자 주

무역업 진출 2년 만에 외환위기, 부도 내지않고 물건 팔아 갚아

조카딸 학자금 500만원 빌려 고구마빵 가능성 믿고 전력투구

어머니 마음을 담아 '고구맘'으로

“외환위기로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까지 하면서 자살도 생각했지만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도저히 죽을 수가 없더군요.”

경북 영주시에서 고구마빵 생산업체인 농업회사법인 ‘고구맘’을 운영하는 황병성(48) 대표. 그는 조카딸의 학자금 저금통에서 빌린 500만원을 밑천으로 고구마빵 제조공장을 가동, 4년 만에 연 10억원의 매출 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황 사장이 처음부터 시련을 겪었던 것은 아니다. 고향 영주에서 경북전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식당운영과 서울 요양시설 근무 등으로 그럭저럭 생활하던 그는 2006년 무역업을 하던 고향 후배를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길을 걷게 된다. 중국에서 잡화와 인테리어소품 등을 수입하는 무역업이었는데 자신이 사업에도 수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후배의 조언과 도움으로 전 세계 잡화류가 모이는 저장성 이우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우시 잡화시장을 다 돌아보려면 빠른 걸음으로 3일은 다녀야할 정도”라는 그는 “사업을 하면서 인생을 걸고 도전해 볼만한 곳이 바로 중국이라고 느꼈다”고 당시 심정을 말했다.

이렇게 모은 2억원이 종잣돈이 됐다. 서울 화곡동 수입품 도매시장에 작은 사무실을 내고 중국을 오가며 특유의 친근감과 신뢰성을 바탕으로 거래처를 뚫었다. 중국 현지 조선족 7명을 채용, 탁자 사무용품 가정용소품 DVD 등 중국산 제품을 국내로 들여와 판매하면서 회사를 키워갔다. “총하고 사람 빼고는 거의 모든 중국산 잡화와 인테리어 소품을 수입해 봤습니다.”

황 사장의 시련은 무역업 진출 2년 만인 2008년 외환위기 때 찾아왔다. 원화가치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수입단가는 서너 배로 뛰었으며 창고에 쌓인 물건은 팔리지 않았다. 자금난으로 4억원의 빚을 떠안게 된 그는 결국 사업에서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빚이 상당했지만 부도를 내지 않고 물건으로 모두 갚았다. 당시 채권자들이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고 했다.

빈털터리가 된 그에게는 이혼이라는 또 다른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살 난 아들은 서울 어머니, 초등학교 6학년 딸은 영주 누나에게 맡겼다. 급기야 자살충동까지 일었다. 막상 목숨을 끊으려니 아들, 딸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절을 찾아 다니며 생전 처음 3,000배를 올렸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2010년 영주의 친구가 고구마로 빵 만드는 사업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그 공장은 문을 닫을 지경이었지만 가능성을 보고 의기투합했다. 월급이라야 최소생활비였고, 동업은 1년 만에 끝났다. “막상 독립하려니 가진 돈이 없어 누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조카 학비로 저금통에 모아둔 500만원과 친구, 후배들로부터 공장 집기와 자동차 등을 빌려 새출발했다”는 그는 공장도 건물주에게 사정해 월세로 임대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구마빵을 전국 최초로 개발한 빵 제조 30년 경력의 김삼홍 명장이 그의 손을 잡아준 것이다. “어머니가 가족에게 먹이는 음식을 만드는 마음으로 빵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담아 ‘고구맘’이라고 이름붙였다”는 그는 “천안 호두과자의 명성을 뛰어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고 말했다.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며 신제품을 연구 개발하고 빌린 냉동차로 전국의 주요 축제장과 박람회장을 뛰어 다니는 날이 이어졌다. 직원도 9명으로 늘어났다. 2013년 가맹사업을 시작해 지금은 서울과 경기도를 비롯한 대구 포항 경산 등 27곳에 커피와 고구마빵을 결합한 커피숍 형태의 가맹점을 개설했다. 급기야 지난해 12월에는 경북도로부터 우수농산물 상표사용자로 지정돼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을 정도로 성장했다.

“2월에는 홍콩에 가맹점을 개설하기로 하고 업무협약을 진행하고 있다”는 그는 “이우시장을 누볐던 무역업 경험을 밑천으로 다시 중국 대륙 개척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매출의 대부분이 재투자로 이어지고 있어 여력이 크게 없지만 회사의 성장세에 맞춰 사회적 기부도 늘리겠다는 생각이다. 황 사장은 “누구에게나 불행과 불운이 닥칠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성공의 밑거름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며 활짝 웃었다.

이용호기자 ly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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