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ㆍ벤처 기업이 보유한 기술을 믿고 자금을 지원해 주는 기술금융(기술신용대출)이 지난해 9조원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규모로는 당초 목표의 2배에 달한다. 그런데도 정작 자금이 필요한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은 거의 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창조경제 활성화를 앞세운 당국의 압박에 은행들이 형식적으로 실적 부풀리기에 나서다 보니 빚어진 일이다.
은행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도입된 기술금융은 당초 실적이 부진했으나 6개월 만인 지난해 말 8조 9,000억원에 달했다. 금융당국이 은행 별 실적공개 등 강력한 드라이브를 건 결과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곳곳이 부실하다. 은행들이 기존 거래기업 대출을 기술신용 대출로 바꿔주거나, 통계상 중소기업 대출로 분류되는 자영업자 대출을 기술금융에 끼워 넣는 수법 등으로 실적 눈가림을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기술금융 항목 대출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나, 실제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은 거의 늘지 않았다. 오히려 줄어든 은행까지 있다. 기업의 기술력을 자체 평가하거나 위험을 분석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정부가 등을 떠미니 기존의 검증된 거래처를 중심으로 형식만 바꿔 돈을 빌려준 셈이다.
시중에 자금이 넘치는데도 유망 중소ㆍ벤처기업이 마땅한 담보거리가 없어 돈 가뭄에 시달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의 먹거리인 기술산업이 활성화하고, 중소기업이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정부 말대로 기술금융 활성화가 절실한 이유다. 은행들이 손쉬운 담보나 보증 대출에만 의존, 자금지원이 필요한 기업에는 융자를 꺼리는 현실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물론 기술의 미래가치만을 평가해 돈을 빌려주는 기술금융은 위험 부담이 크고 단기 효과를 거두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은행보다는 ‘앤젤 펀드’ 등 모험자본에 맡겨야 할 긍융 형태라는 지적도 있다. 더욱이 선진국처럼 기술금융을 제대로 하려면 은행들이 저마다 고도의 대출심사와 위험분석, 사후관리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정부가 기술금융의 양적 확대에만 급급할 경우 결국 시늉에 그치거나, 때로는 은행 부실과 리스크만 키우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 기술금융을 자산운용사 등 비은행권까지 확대해 취급하도록 하고, 기술금융 전체 규모를 20조원까지 대폭 늘리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 때 녹색성장을 지원하는 녹색금융을 급조해 드라이브를 걸었다가 금융부실만 키운 전례가 있다. 정부의 이번 의욕이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우선은 지속가능한 기술금융 생태계 조성부터 서둘러야 한다. 무엇보다 기술신용평가시스템을 정교하게 다듬고, 은행들의 자체 검증역량 강화를 지원하는 등 내실을 강화하는 데 정부와 은행이 힘을 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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