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법조항 헌재서 위헌심판 중인데 피해자 손배 불가 서둘러 못 박아
대법관 소수의견도 "공평·정의 어긋"
민주화운동보상법(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상을 받았다면,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를 입었더라도 별도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하급심이 해당 법 조항에 대해 위헌심판 제청을 한 상태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대법원이 서둘러 판결한 것을 두고 법조계에서 비판이 나오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문인들을 간첩으로 몰아 형사 처벌했던 ‘문인 간첩단 조작사건’의 피해자 김우종(85) 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와 소설가 이호철(83)씨 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3일 밝혔다.
1974년 국군보안사령부는 문인들이 일본 내 북한 공작원 등의 위장 잡지인 ‘한양’에 원고를 게재하고 원고료를 받았다며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을 적용해 구속했다. 보안사는 가혹행위 등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냈고, 검찰은 국가보안법상 회합ㆍ통신 등 혐의만 적용해 기소, 김씨 등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형을 각각 받았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재심을 권고했고,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문인들은 2005~2008년 개인당 700여만~1,300여만원의 보상금을 수령했으며, 별개로 “보안사의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냈다. 1심에서 11억8,800여만원, 2심에서 6억9,600여만원의 배상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대법원은 “김씨 등이 보상심의위원회의 보상금 지급결정에 동의한 이상 민주화보상법 제18조 2항에 따라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발생한다”며 결과를 뒤집었다. 재판상 화해란 당사자가 서로 양보해 다툼을 해결하는 합의 절차로, 화해가 성립되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다.
고영한 김소영 김용덕 김창석 이상훈 대법관은 소수의견으로 “유사한 과거사 사건에서 다액의 위자료를 인정해 온 대법원 판결과는 달리, 보상금 등 지급결정에 동의했다는 사정만으로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청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공평과 정의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지난해 6월 서울중앙지법 민사19부(부장 오재성)는 “손실보상과 손해배상은 엄격히 구분되는 개념인데도 합리적 이유 없이 국가배상 청구권을 제한한 것으로 의심된다”며 민주화운동보상법 18조 2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제기, 헌재가 사건을 심리 중이다. 고위법관 출신의 한 원로 변호사은 “헌재가 위헌 여부를 살펴보는 상황에서 서둘러 대법원이 판단을 내린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다”며 “법원 스스로 엇박자를 내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헌재에서 위헌결정이 내려져도 소급 적용되지 않아 문인들은 위자료를 받을 수 없다. 이호철씨는 “돈 문제가 아니라 민주화 운동과 문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며 “문인협회와 작가협회, 소설가협회, 펜클럽 등과 협의해 성명서 발표하고 집단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종 씨는 “몇백만원 받았으니 끝난 것 아니냐는 건데, 이번 것은 재심에서 무죄 선고 받은 것을 계기로 손해배상 청구한 것이기 때문에 그때 보상금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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