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한 선배들은 우리를 “당구도 못 치는 녀석들”이라 부르곤 했다. 동기들 중엔 당구에 빠져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선배들 눈에는 우리가 대체로 교조적이고 핏발 선 눈빛의 재미없는 후배들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나 보다. 20대 초반 대학생이라면 가질 희망이나 낭만을 배격하며 불만에 가득 찬 하루하루를 산 우리들이니 노래 역시 운동가요 아니면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른바 사회성 또는 시대성이 드러나지 않은 일반 가요라면 무시하거나 경원했기 때문이다. 어둡고 숨 막힌 시대가 계속될 것만 같았기에 대중문화도 개혁적 또는 저항적인 것이 주류가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웬걸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대학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니 우리는 퇴물이 되어 있었다. ‘X세대’, ‘신인류’가 등장해 개인과 개성, 자아 등 이전에는 금기시되거나 드러내지 못했던 것들을 거리낌 없이 외쳤다. 80년대와 90년대는 그렇게 달랐다. 달라진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우리는 음침한 눈빛과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요즘 애들은…” 운운하며 푸념을 늘어놓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다. 이른바 386이라 불리는 우리들은 처음 외식이었던 자장면에 꽂혀 다른 음식이라곤 생각도 못하는 철부지처럼, 뇌리에 운동가요가 깊이 박혀 있었고 그밖엔 조용필, 이선희, 이문세, 김현식, 신형원 정도가 떠오를 뿐이었다. 90년대와 그 세대의 문화는 그들만의 리그일 뿐 별다른 큰 파장 등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다가 맞을지 모르겠다. 386들에게 90년대야말로 본격적 의미에서의 생활인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민 시절이라 그랬는지 쉽지 않았던 기억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억지로 재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80년대가 암울해 희망도 없던 시기였다면 90년대는 적응하기 힘든 피곤한 시절로 80년대 학번들에게 남아있나 보다.
386특유의 삐딱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았고 S.E.S는 노래하는 가수가 아닌 그저 예쁜 소녀들로 삼촌들 눈요기하는 걸 그룹의 원조 정도로 비하했고 김건모는 불량스러운 그래서 쉽사리 정감이 가지 않는 친구 정도, 소찬휘는 부담스러운 성량을 강요하는 피곤한 가수, 조성모는 참기름 통에서 막 건져놓은 것 같은 매끈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정현의 광기어린 듯 한 압도적인 끼를 감당하기 힘들었고, 엄정화의 과한 섹시 컨셉은 부담스러웠다. 이처럼 386들은 90년대의 대중문화와 대중가요를 즐기기보다 싫어해야할 이유를 먼저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90년대와 그 시대의 대중문화는 우리 세대와 친숙하지 못했구나 하는 정도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음을 ‘토토가’에서 느끼고 또 확인할 수 있었다. 몇 차례에 걸친 준비 과정에서 공연까지 본방사수는 물론이요 케이블에서 나올 때마다 보았고 VOD로도 보고 또 다시 보았으니 도무지 몇 번을 본지 모르겠다.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울컥하는 가수들의 모습을 보며 저절로 눈물이 났다. 그들의 지금 모습과 옛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 보였는데 그 속엔 그들의 젊은 시절 모습만이 아니라 당구도 못 치는 우리 친구들이 섞여 있었고 어느 후미진 구석에 내 모습도 보였다. 그 시절은 우리가 주역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함께할 자격은 있다고 믿고 싶다. 진정 즐거워하는 흥에 겨운 관객의 모습과 우리 삐딱한 386들은 자연스럽게 대비되었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 놓여있는 과거를 직시하고 또 다른 과거를 “기쁜 우리 젊은 날”로 반추하게 한 결정적 요인은 오로지 무한도전 때문임은 물론이다. 토토가 출연진의 대부분은 금세 소비되고 잊혀질 것이고 한참 뒤에 가요무대 같은 회고조 프로그램에서나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전국노래자랑을 보며 흐뭇해하시듯 우리도 우리 나름의 전설을 갖게 됐다. 나의 입가에선 지금도 S.E.S의 ‘암유골(I'm Your Girl)’과 ‘젓소필링(Just A Feeling)’이 저절로 흘러나오니 말이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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