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자유가 무구하진 않다. 테러만 야만이 아니다. 조롱은 비린 짓이다. 약자를 축출한다. 표현을 통제하는 건 권력이다. 불온해야 풍자다. 사이비지만, 방종은 세다. 진짜를 누른다.
“이달 초 프랑스 파리의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사무실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칼라시니코프(AK-47) 소총과 로켓발사기로 무장한 테러범들은 편집국에 난입해 편집회의 중인 기자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 파리 시민들은 희생자에 대한 추모 집회에서 “나는 샤를리다(Je suis charlie)”라는 슬로건을 외쳤다.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며 테러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샤를리 에브도가 표현의 자유를 남용했다며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Je ne suis pas charlie)”라는 슬로건도 등장했다.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며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 위와 같은 논쟁의 배경에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이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데 있어 이중적 잣대를 적용한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유럽 주요 국가는 반유대주의 표현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고 ‘홀로코스트 부정 금지법’이 제정돼 있어 이를 위반한 경우 사법처리 대상이 된다. 반면 반이슬람주의 표현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제가 없다. 표현의 자유가 종교ㆍ인종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나아가 테러범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중 잣대 속에서 잉태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테러범들은 알제리 이민자의 후손이다. (…) 이민자들의 이슬람교에 대한 절대적인 신봉은 사회에서 인정되기 어려웠고, 사회적 다수에게 이민자들은 다른 종교를 지닌 다른 인종이었다. (…) 우리사회도 성별, 지역, 인종에 따른 차별적 표현들이 많고 이로 인해 적지 않은 갈등이 발생한다. (…) 차별적 표현은 남성, 다수 인종 등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의사표시이다. (…) 권력과 힘의 차이로 인해 소수자들의 억울함은 묻히기 쉽다. (…) 그러나 대부분의 차별적 표현은 집단적 명예훼손으로 간주돼 처벌이 쉽지 않다. 법원은 “구성원 개개인에 대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가 될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일본최고재판소가 내린 판결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최고재판소는 극우단체인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의 “조선인은 일본을 나가라”, “스파이의 자식들” 등의 차별적인 표현에 대해 “재일조선인을 혐오ㆍ멸시하고 일본 사회에서의 공존을 부정하는 시위는 인종차별에 해당하기 때문에 법으로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표현의 자유는 인간이 가져야 할 중요한 권리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이중적으로 적용되고 약자를 억누르는 방식으로 악용된다면 갈등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를 규제할 필요성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제한할 수 없는가(한국일보 ‘아침을 열며’ㆍ허윤 법무법인 예율 대표 변호사) ☞ 전문 보기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에 중의성을 부여한다. 사실과 논리의 힘이 폭력을 이길 수 있다는 본래 의미와 함께, 어떤 표현 행위는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비수보다 더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경고를 품는 말이 됐다. (…) 1985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한 영화가 상영금지됐다. 하느님을 병약한 노인으로, 예수를 지적장애인으로, 성모 마리아를 음탕한 여인으로 묘사한 영화였다. (…) 제작자 쪽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유럽연합의 최고 법원인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했다. 재판소는 판결(1994년)에서 종교에 대한 모독은 허용된다고 밝혔다.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자신의 종교를 부정하거나 적대시하는 표현까지도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표현의 ‘정도’가 문제됐다. 재판소는 “모독이 극단적일 때는 그 종교를 믿는 이들의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게 된다”며 “불필요하게 모욕적이어서 사회적 토론이라고 볼 수 없는 표현은 제한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 두 가지 차별점이 보인다. 첫째, 영화가 기독교의 신조를 직접 공격했다면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보다는 정치적 토론의 영역에 가깝다. 이 영역에서는 유럽인권재판소의 지적처럼 “모욕적이고 충격적이고 혼란을 일으키는” 표현까지도 허용돼야만 민주주의가 질식하지 않는다. 둘째, 인스브루크에서는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지만 프랑스에서는 무슬림이 소수라는 점이다. 소외되고 억눌린 집단은 모욕적인 공격을 당했을 때 존엄성과 정체성의 상처가 더 깊고, 사회적 토론의 장에서 맞대응할 능력도 떨어진다. 그만큼 더 보호될 필요가 있다. (…) 칼과 방패를 든 상대방을 찌를 때 펜은 정당한 ‘무기’가 되지만 무방비 상태의 상대방을 찌를 때 펜은 ‘흉기’일 뿐이다. (…)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폭넓게 보장하면서도 종교ㆍ인종ㆍ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헤이트 스피치)은 강하게 규제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 이런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표현의 자유는 정확히 전도돼 있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해산당하고 기소당하고 출국금지당한다. 반면 성적 소수자에 대한 극언과 지역차별의 망발이 난무해도 제재할 생각조차 못한다. 비탄에 빠진 세월호 유족들에게는 말의 비수들이 숨쉴 틈 없이 내리꽂힌다. 이렇게 ‘흉기’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펜은 칼만큼 날카롭다(한겨레 ‘아침 햇발’ㆍ박용현 논설위원)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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