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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비정규직 해법

입력
2015.01.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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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수수께끼 중의 하나가 선조의 다급한 도망이었다.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조는 “충주(탄금대)에서 패전 보고가 이르자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播遷ㆍ임금이 피난감)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라고 전한다.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이 탄금대에서 패전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선조가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는 뜻이다. 일본군이 도성(都城ㆍ서울)에 그림자도 비치기 전에 선조가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도성에서는 큰 소동이 일었다. 종친과 신하들이 술렁이자 선조는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고 진정시켰는데 박동량(朴東亮)이 기재사초(寄齋史草)에서 “궁중에서는 몰래 짐을 꾸리면서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하는 것처럼 몰래 도망갈 준비를 했다. 그렇게 선조 일행은 4월 30일 새벽 궁궐을 빠져나갔는데, 때마침 비가 퍼부었다. 그날 선조실록은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東宮ㆍ세자)은 반찬도 없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또한 윤국형(尹國馨)은 문소만록(聞韶漫錄)에서 “저물어서 동파역(東坡驛ㆍ파주)에 이르러서 밤비가 죽죽 내리는데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잤다. 임금이 드실 음식도 난리를 일으킨 군사들(亂卒)에게 빼앗겼다”라고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국가의 정상 시스템이 붕괴한 것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은 동파관(東坡?)에서 밤을 새운 선조의 상태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날 아침에 선조가 대신 이산해와 류성룡을 불러서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면서, ‘이모(李某ㆍ이산해)야 류모(柳某ㆍ류성룡)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다 털어놓으라’라고 괴롭게 말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그런데 선조가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라고 말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선조의 “어디”는 압록강 건너 요동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도망가는 것이 국난을 맞아 국왕 선조가 고안한 최고의 계책이었는데, 선조의 요동 도주 계획을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이라고 한다. 이때 좌의정 류성룡이 “안 됩니다. 대가(大駕ㆍ임금이 탄 가마)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라고 반대하면서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선조는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라고 강행 의사를 밝혔고, 류성룡은 거듭 안 된다고 반대했다. 선조는 실제로 대신에게 요동으로 도주할테니 받아달라는 국서를 작성해 명나라에 보내라고 명령했다. 선조는 요동으로 도주해 비빈(妃嬪)과 환관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오는 몇몇 신하들을 데리고 여생을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망해도 나만 살면 된다는 ‘선사후공(先私後公)’의 극치였다.

그런데 선조는 왜 이렇게 도주하기 바빴을까?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선조의 피난 행렬이) 돈의문을 나와 사현(沙峴)에 이르자 동쪽 하늘이 점점 밝아왔다. 도성 안을 돌아다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 불이 나서 연기와 불꽃이 이미 공중에 치솟고 있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불은 조선백성들이 지른 것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의 어가(御駕)가 떠나자 백성들이 난입해서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다”고 전한다. 바로 여기에 선조가 도주하기 바빴던 핵심 요소가 있다.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해 선조수정실록은 “두 곳의 관서에 공사(公私) 노비(奴婢)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신분제의 질곡에 시달리던 노비들은 선조 일행이 도주하자 노비 문서가 있는 형조와 장예원에 불을 지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비들은 일본군에 적극 가담했다. 재위 25년(1592) 5월 4일 개성까지 도주한 선조는 윤두수(尹斗壽)에게 “적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선조실록 25년 5월 4일)라고 물었다. 조선 백성들, 특히 노비들이 일본군에 대거 가담했다는 뜻이다. 바로 이 때문에 조선은 끝났다고 생각한 선조가 요동으로 도주하려 한 것이다.

조선의 노비는 현재로 비유하면 비정규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비정규직 종합대책이라고 할 수 있는 장그래법이 논의되고 있다. 비정규직 숫자는 정부통계로는 607만명이고 노동계에서는 852만명이라고 파악하고 있는데, 신분적 차별과 임금 차별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한국 사회에 미래는 없다. 비정규직을 4년 연장하는 따위는 아무런 방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를 대책이라고 내놓은 사람들도 알 것이다. 한전 부지 매입에 예상가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 10조5,000억원을 써낸 그 통 큰 마음으로 비정규직을 바라보면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장그래의 숫자만큼 사회는 불안하다는 사실을 말해준 역사적 사례가 임진왜란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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