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를 다녀왔다. 비행기만 22시간 넘게 탔다. ‘산티아고아밀연극제’에 극단이 초청돼서다. 말 그대로 지구는 둥글었다. 거기는 여름처럼 더워서 반팔로 다녔다. 외국을 나갈 때마다 절감한다. 언제나 그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문화가 있고 문명이 있구나. 거리를 막 돌아다니는 개와 느슨하게 완보하는 노부부와 스케이트보드를 지치는 소년들. 산티아고, 산호아킨, 랑카구아 이렇게 세 곳을 돌아가며 공연을 했다. 당일 공연도 두 곳이나 됐다. 정확히 12시간 차이가 나서 낮밤을 바꿔 살았다. 그 먼 곳까지 가서 여행할 짬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으나 공연은 꽤 성공적이었다.
최선택이라는 분을 만났다. 1980년대에 이민을 오셨단다. 그런데 그분의 연극사랑이 극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창시절 연극을 했고 극단 생활도 하셨다니! 처음 칠레로 이민 와서 열심히 돈을 버셨단다. 대학로에 소극장을 차리기 위해서다. 말 그대로 3, 4년 만에 25만 달러 가량을 버셨단다. 꿈에 부풀어 곧장 한국에 돌아왔다. 대학로의 땅값을 보니 그 사이 성큼 올랐다. 그 돈으로는 전세 값밖에 안된다. 어쩔 수 없이 생각을 접고 다시 칠레로 돌아갔다. 최선택씨는 또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이번에는 100만 달러를 만들었다. 다시 꿈을 안고 한국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친구들이 말렸다. 괜한 고생하지 말고 그냥 연극하는 사람들 후원이나 하시오. 돈도 여전히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 분은 꿈을 접었다.
귀국하기 전날 팀을 댁으로 초대하셨다. 22명이나 되니 만만치가 않다. 그런데 그분의 집이 고대광실이라 넉넉하고도 남았다. 오랜만에 포도주에 우리 음식들로 배불리 먹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우리에게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연극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최선택씨는 아낌없이 우리에게 온정을 베풀었다. 거실 한 쪽에서 그 분이 보던 낡은 연극 책과 젊은 시절 연극사진들을 보았다. 특별하면서도 애잔했다. 한 한국인 청년의 꿈이 칠레의 어느 하늘 아래에서 조용하게 먼지에 덮여가고 있었다. 사실 그날에서야 나는 그분의 함자를 여쭤 알았다. 선택이었다.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선택은 선택을 하고 살아 예순 살이 넘어 지금 그 칠레에 있었다.
주마등처럼 나의 짧은 인생도 겹쳐졌다. 그분처럼 선택을 하고 살았다.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연극을 선택하고 극단을 만들고 다시 형편이 어려워져 돈을 벌고 다시 연극을 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연극을 선택하며 살았다. 아니 되돌아왔다. 악어가 사는 물가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누우처럼 어김없이 연극으로 돌아왔다. 아찔한 순간과 맞닥뜨릴 줄 알면서도 돌아왔다. 맞다. 어쩌면 나는 선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냥 운명처럼 이 길에 떠밀려 들어왔다. 순간은 선택이었으나 돌아보면 운명처럼 그 길에 있었다. 과연 우리는 인생을 선택하며 살 수 있을까. 늘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선택은 두 갈래 길에서 한쪽을 취해야만 한다. 한 쪽을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 대저 그게 현실이다.
그런데 잠깐 떨어져서 봐 보자.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만 보이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도 된다. 두 가지를 다 보지 않으면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올해의 화두를 ‘뚜벅뚜벅’으로 삼았다. 그냥 가던 길을 해찰하지 않고 규칙따라 가기로 마음을 잡았다. 단순하면 선명해진다. 내가 최선생님이었다면 전세로라도 소극장을 가졌을 것이다. 당연히 우매한 선택일 수 있다. 집주인한테 시달릴 게 뻔하다. 그러나 소극장을 가졌으니 됐다. 머지않아 산산이 부서질지언정 꿈은 이뤘다. 나도 소극장을 가졌었다. 전세도 아닌 월세였다. 연습실을 포함해 한 4년을 하다 결국 임대료를 못 내고 법원의 소장을 받아 쫓겨났다. 그러면 어쩌랴. 내 심장은 시련 속에서 더 다져지고 담대해졌다. 이런 글을 쓰다 보니 후의를 베푸셨던 선생님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선택은 계속된다는 말씀, 드리고 싶다. 포기하지 마시라는 말씀, 드리고 싶다. 순간 속에 영원이 담긴다. 영원 속에 순간이 담기는 것은 아니다.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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