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우리는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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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우리는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입력
2015.01.1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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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이중잣대, 논쟁적 코미디언 페북에 구호 올려

나는 샤를리다의 한계, 사회운동으로 발전 가능성은 희박

타산지석 삼으려면, 공동체 통합·개선 기회로 삼아야

로이터 연합뉴스

프랑스 주간 풍자신문 샤를리 에브도 편집실에 무장 테러범들이 난입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비극적 사건 이후, 세계 곳곳에서 테러에 굴하지 않고 어떤 성역도 없이 풍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겠다고 “나는 샤를리다”라는 연대의 구호가 퍼졌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은 무슬림을 향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듯, 자신들의 정체성이 조롱 대상이 될 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도발적으로 표현하고자, 반유대주의나 나치 옹호 논란 등으로 유명한 논쟁적 코미디언 디외돈네가 관련 테러범 중 하나였던 쿨리발리의 이름을 합친 ‘나는 샤를리 쿨리발리다’는 구호를 만들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오래지 않아 그는 테러선동죄로 체포되었다.

● 샤를리 테러는 소외계층의 불만 폭발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프랑스 사회 내부의 오랜 계급 갈등이 특정한 방식으로 폭발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민자 중심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외곽지역에서 게토화되고, 그들의 사회적 소외가 무력감과 분노로 누적되어 폭력으로 번지는 과정을 그려낸 프랑스 영화 ‘증오’가 영화제를 휩쓴 것이 이미 1995년의 일이다. 파리 교외에서 엄청난 소요사태가 벌어지며 프랑스 이민자 동화 정책의 재평가를 촉구하게 만든 것도 2005년이다.

이번 사건은 사회적 소외를 당하는 계층은 여전한데, 그들 중 일부가 소외의 탈출구로 종교적 극단주의라는 선명한 문화적 정체성에 매혹되어 자신들의 폭력에 종교의 이름을 내걸었다는 새로운 위험한 패턴이 추가되었을 따름이다. 다만 만평에 대한 불만을 보복 테러로 표출한 것이어서 분명히 표현의 자유가 위협당한 부분이 있고, 바로 그 부분이 서방 세계 전반에서 넓은 연대를 얻어냈다. 계급화와 종교 정체성 연결 같은 문제는 각자의 맥락이 다르지만, 표현의 자유와 규제 문제는 보편적 관심사가 되기 때문이다.

디외돈네 소동이 증명하듯,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 원칙 아래에서 누군가를 조롱할 권리는 있지만,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이상 합리적 이유와 구체적인 상대를 적시하지 않은 조롱을 남발할 정당성은 없다. 그리고 그런 이유 제시나 대상 지정도 많은 경우 대단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한편 조롱을 당했을 때 분노하고 대응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 분노를 풀기 위해 사적 폭력을 동원해 보복할 권리는 없다. 물론 공적 규제는 함께 고려해야 할 원칙이 많고 종종 사회적 권력관계에 따라 무게추가 기울어진다. 그래서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다원성을 위해 허용해야 할 표현 수위, 그리고 공동체를 파괴할 위험이 더 크기 때문에 제한해야 할 수위 사이의 경계선 긋기가 어렵다.

● 미디어 발달로 화제 전파력 폭발적

미디어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화제가 되는 이슈는 강력한 구심력을 갖고 빠르고 넓게 전파된다. 그 과정에서 논점 역시 매우 단순화되기도 한다. “나는 샤를리다”라고 연대를 표명하는 온라인 사회 운동이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에서 해시태그로 퍼지면서, 테러 규탄과, 무제한적 표현의 자유 옹호, 샤를리가 게재한 만평에 대한 동의가 모두 한 세트가 되어버렸다.

물론 대안적 가능성도 같은 공간에서 탄생한다. “나는 아흐메드다”가 대표적이다. 아흐메드는 범행 현장에서 테러범들을 제지하려다 죽임을 당한 무슬림 경관의 이름이다. 이 구호는 무슬림의 믿음과 문화를 조롱한 샤를리가 아니라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를 지켜주다 목숨 바친 이를 기리는 것이 더 옳은 자세라는 운동이다. 하지만 사안을 훨씬 단순하고 선명하게 소화해내는 “나는 샤를리다” 구호에 비하면 호응도와 전파력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단순화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온라인에서 대단한 규모로 모은 연대를 무엇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 여부다. 구호를 붙이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정작 테러범 검거와 후속범죄 방지는 프랑스 치안 당국의 몫이다. 이런 연대가 없다고 그들이 테러 대응을 게을리 할 리도 없다. 만평이 범죄자들에게 공격받았을 뿐 사회적으로 금지된 것이 아니라면, 단지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과시하겠다고 그 만평을 더 널리 퍼트리는 것도 대체로 무의미하다.

즉 “나는 샤를리다”는 테러 피해에 대한 조의를 표하는 것 말고, 사태 자체에 대해서 무언가를 해내보자는 운동으로서 나아갈 구석이 희박하다. 화제성 사안을 계기로 표현의 자유와 타인에 대한 존중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 것인지 하는 화두의 복잡미묘함에 눈을 뜨고, 실제로 무언가를 고쳐낼 가능성이 있는 사안들로 관심을 확장시키는 단계로 나아가야 비로소 샤를리 운동은 타산지석이 된다.

● 사우디 태형 사건 샤를리만큼 중요

이런 측면에서 관심이 실제 운동으로 연결될 수 있는데도 충분히 대중적 화제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사우디 블로거 구명 운동이 많은 아쉬움과 시사점을 남긴다. 사우디 당국은 2012년에 ‘프리 사우디 리버럴’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한 블로거 라이프 바다위를 체포해 곤장 1,000대와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태형은 50대씩 나누어 일주일에 한 번씩 20회에 걸쳐서 공개적으로 진행하기로 되어있는데, 최근 첫 번째 형을 강행했다. 다만 상처 치유가 더디어져 두 번째 매질이 일시 연기된 상태다.

바다위가 지었다는 죄는, 블로그 글로 사우디의 종교 경찰인 선행증진-악행방지부를 조롱했으며 문제가 되는 글들을 내리기를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종교를 버렸다는 배교 죄목으로 걸렸는데, 정작 그가 남긴 글들의 수위는 정치체제의 혁명을 부르짖는 혁명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종교 지배가 아닌 세속주의를 옹호한 정도였다.

“어떤 종교도 인류의 시민참여적 진보와 연결되어있지 않다. 이것은 종교의 문제점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종교라는 것은 개인과 창조주 사이에 맺어진 특정하고 정교한 영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실정법이란, 인간과 사회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교통법, 고용법, 국가 행정 원칙 등은 종교에서 얻어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 가디언지 영역판 기준)

사우디 정부는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터지자 공식적으로 규탄 성명을 냈다. 즉 그들이 가진 ‘표현의 자유’의 기준은, 프랑스에서 만평으로 무슬림에 대해 거칠게 조롱했다고 테러 보복을 당하는 것에는 반대해야 하지만, 자국에서 블로그 글의 정제된 논변으로 세속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공권력을 동원해 중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샤를리 에브도 사건 직후 형 집행을 시작한 것은 사우디가 최근 더욱 강화한 무투파 종교 극단주의자(지하디스트)들에 대한 체포와도 맞물려 있다. 즉 지하디스트도 세속주의자도 배제하는, 안정적인 종교정치를 가꾸겠다는 엄포인 셈이다.

사우디 블로거 태형 사건은 통제 불능의 범죄사건이 아니라, 국가기관이 제도적으로 벌이는 일이기에, 국제적 압력이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그나마 더 높은 편이다. 대중운동으로 각국의 정부를 압박해 외교적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어, 형 집행 연기나 취소 등의 구명조치를 얻어내는 것을 구체적인 목표로 삼을 수도 있다. 앰네스티 같은 국제 인권단체가 구심점 역할을 이미 하고 있다.

● ‘표현 자유’‘사회 통합’ 의식한 관심 절실

표현의 자유라는 시각으로 보자면, 프랑스와 사우디에서 일어난 일은 나름대로 정상국가라고 할 만한 사회에서 누군가의 표현을 무슬림에 대한 조롱으로 느낀 이들이 그것을 틀어막고자 부당한 폭력을 가했다는 면에서 유사하다.

사우디 쪽이 분명 사상자 규모가 작지만, 공권력이 나서서 행한다는 점에서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다. 하지만 ‘라이프를 석방하라’(#FreeRaif) 해시태그에 대한 호응은 폭발적이지 않고, 사건 자체도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대중적 호응을 통해 변화를 유도해낼 가능성이 더 분명한 것은 사우디 쪽이다. 어떤 운동을 위해 대중들이 얼마나 모이느냐는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냐보다는 얼마나 화제가 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난다는 현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런 현실 또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요소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각자 자신의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의 수위를 조율하고, 또 공동체 통합을 만들어낼 것인지 성찰하고 개선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연장에서 백색 테러 사건이 터졌는데 정작 테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콘서트의 북한 친화적 내용에만 혀를 차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아무래도 곤란하다.

김낙호 미디어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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