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의 누적 관객 수가 올해 처음 1,000만명을 넘어섰고, 이는 역대 한국영화 중 11번째 기록이다. 그 이상의 대기록을 세우는 일 역시 시간문제라 생각될 정도의 기세다. 영화를 둘러싼 갑론을박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미 큰 성공을 거뒀다. 관객들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빛 바랜 한 장의 가족사진처럼 담담하게 그려내고, 또 진부하지만 감동적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정치적 해석과는 별개로 많은 이들이 내 이야기라 느낄 수 있는 한국 현대사와 가족 이야기가 허구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들며 담백한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이야기의 힘에 바탕한 연출의 단순명료함이 오히려 많은 관객에게 친근한 감동을 줬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국제시장’은 역사의 한 가운데 던져진 개인의 굴곡진 인생사와 이를 이겨내는 의지와 정직한 노력이라는 차원에서 미국 영화 ‘포레스트 검프’와 닮아있다. 또 한국 현대사를 ‘선택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인해 ‘박하사탕’이나 ‘화려한 휴가’와 비교되기도 한다. 가족애와 우정, 사랑과 액션 등 다양한 장르적 재미를 골고루 담아낸 것도 흥행의 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관객은 격변의 현대사를 몸으로 부대끼며 가족을 위해 희생한 아버지 세대에 연민을 느끼면서 자기 동일시하게 된다. 여기에 왜 4ㆍ19나 광주민주화운동, 혹은 87년 체제에 대한 설명이 없느냐는 비판은 그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영화적 재미는 사실성이나 정치적 올바름에서 오지 않는다. 관객은 종종 만듦새가 엉성한 영화에 열광한다.
그러니 영화가 선택한 재현의 방식에 관해 왜 역사를 균형 있게 다루지 않거나 한국사회의 발전이 산업화 세대뿐 아니라 민주화 세대에도 빚지고 있는 것인데 왜 이 부분을 누락했느냐는 비판은 일리는 있을지라도 그리 효과적이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문화산업의 상품으로서 영화는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두 시간 길이의 영화 속에 감독은 내러티브와 미장센, 편집 등을 통해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린다. 이는 영화가 텍스트로 탄생하기 위한 존재 조건이다. 그런데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쟁은 주로 영화가 말하지 않는 것을 왜 말하지 않는지, 혹은 말하는 것들을 왜 그런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지에 관해 벌어지는 논쟁으로 보인다.
이를 보다 생산적인 것이 되게 하려면 영화 외적인 요소들에 대한 감정적이고 과도한 정치적 해석보다 좀 더 차분한 텍스트 분석이 필요하다. 그 중 하나는 영화가 분명한 어조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 외에, 이 안에 결핍되거나 부재하는 것, 혹은 주변화해 이야기하는 것을 끄집어내 밝게 비춤으로서 텍스트를 부자연스럽거나 생경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역경과 고난 속에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산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는 감독의 제작의도와 무관하게 영화가 생성하는 담론의 차이와 다의성을 보다 창조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될 것이다.
가령 주인공 덕수가 경험하는 현대사의 질곡과 이를 극복하는 방식은 한 개인의 운명에 작동하는 복잡한 정치경제적, 사회적 맥락이 소거된 채 그저 ‘운명’으로 묘사된다. 또 영화는 파독과 베트남전 참전 등 빛과 그림자가 혼재하는 현대사의 사건들을 불편할 정도로 신파적이고 낭만화한 시각으로 그려낸다. 영화 속 젊은 세대는 병들고 늙은 부모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외국인을 차별하는 등 다문화사회에 역행하는 철부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는 한 평생을 가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적 삶을 살아온 아버지 세대가 계도하거나 교정할 대상일 뿐, 영화에는 팍팍한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고뇌와 분투에 관한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요소들은 영화가 지닌 이야기의 보편적 감수성과 감동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일종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프로파간다적 효과를 지닌다. 또 이는 기성세대로 하여금 왜 많은 젊은이들이 ‘변호인’과 ‘미생’에 열광하는지에 대한 이해와 그런 노력 자체를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가족애와 이타심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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