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대해 표현하고 발언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하는 세계는 끔찍하다. 프랑스의 풍자 만평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로 12명이 사망한 사건은 참담한 비극이다. 희생자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 다만 애도의 구호로 외쳐진 “우리는 모두 샤를리다”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심지어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가들을 “위대한 언론인”이라고 추앙하는 목소리도 들리던데, 이것은 지나친 과장이자 미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풍자’와 ‘나쁜 풍자’를 나눌 수 있다고 본다. 대상과 목적이 적절할수록 좋은 풍자다. 풍자는 한 줌의 권력도 지니지 못한 존재들이 큰 권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의 위선과 모순을 고발하고, 웃음으로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탄생했다. 현존하는 현상이나 힘을 가진 권력에 대한 풍자일수록 ‘힘세고 강한’ 풍자다. 그러나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 가운데 상당수는 무덤 속의 고인에 대한 능욕이었다. 이것을 좋은 풍자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덤 속의 마호메트를 조롱하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문제를 제대로 보는 것과 무관하다. 어떤 거대한 문제를 특정 개인의 탓으로 일축하는 것은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이유에 대한 성찰을 막는다. 마이클 잭슨 사망 뒤 백골이 된 그를 그리며 “마침내 하얘졌다”고 조롱한 만평은 어떠한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항변할 수 없는 이에 대해 공격하는 행위는 저열하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편견 어린 조롱과 공격에 시달리고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는 맥락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언론의 사회적 책무를 상기해본다. 언론은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알도록 돕고, 공동체의 명운이 걸린 일을 공정한 방향으로 끌어가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사건을 보는 관점을 협소하게 만들고 대상을 타자화하는 보도와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적대감을 부추기는 조롱은 경계돼야 한다. 몰이해와 적대감이 고조되다 보면 ‘우리’가 아닌 ‘적’을 제거해야 하고, 이를 위한 폭력은 정당화된다는 감각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은 언어폭력이지만 물리적 폭력으로 번지기도 한다. 온라인 게시판에서 다른 인종, 특정 지역, 특정 정치세력에 대해 혐오발언을 늘어놓으며 낄낄대던 이들 중 일부는 ‘서북청년단재건위’이라는 이름으로 결기했고, 어떤 이는 재미교포가 북한 체험에 대해 말하는 행사에 찾아가 종북이라 비난하며 폭탄을 던졌다. 그는 영웅이라도 된 양 만족감과 희열에 몸을 떠는 것으로 보였다.
샤를리 에브도에 테러를 가했던 형제 역시 영웅이 되고 싶었던 젊은이였다. 저학력ㆍ저소득 계층이었던 이들 형제는 낮은 자존감과 무력감을 느끼던 중 이슬람 근본주의와 조우했다. 이는 삶의 목적을 부여했다.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리라 결기한 서북청년단처럼, 이슬람교를 위해 순교하리라 결심한 이들은 끔찍한 비극을 초래했다. 청년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사회, 이슬람 근본주의의 마수가 사건의 원인으로 분석되지만, 갈등을 부추기며 청년들의 ‘버튼’을 누른 언론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인다. 이것을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당할 짓을 했다”고 오독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앞서 말했듯, 무언가에 대해 표현하고 발언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 것은 퇴행적인 비극이다. 핵심은 ‘편가르기’와 적대가 넘쳐나는 사회가 근본주의나 극우주의를 자극한다는 것, 언론이라면 특히 극단적 대립과 폭력을 부추기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국제인권 규약에도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증오의 고취는 법률로써 금지된다”고 적혀 있다.
한국은 어떠한가. 테러로 인해 사람이 크게 다쳤는데 오히려 피해자들이 테러당할만 했다는 어조로 말한 대통령, ‘종북’ 딱지를 붙이며 재미 보는 정치권, 특정 집단에 대해 편견을 부추기는 원색적인 발언들이 오가는 일부 종편 프로그램의 향연을 보면 우려스럽다. 샤를리 에브도를 추앙하며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에 앞서, 언론의 사회적 책무를 돌아보고 한국 사회에 더 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데 힘써야 할 때이다.
최서윤 <(격)월간잉여> 발행ㆍ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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