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메아리] ‘흥신소’ 검찰

입력
2015.01.14 18:52
0 0

비리는 못 캐고 정치권 하수처리만

심부름꾼 노릇이 부끄럽지 않은가

청와대 하명 아닌 법의 명령 따라야

시절이 하 수상해서일까, TV 드라마에도 거악(巨惡)이 판친다. 드라마마다 주야장천 연애하기 바쁘던 검사들이 SBS ‘펀치’에선 본업이든 권력놀음이든 모처럼 일로 분주하다.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의 엎치락뒤치락 다툼을 박진감 넘치게 그리다 보니, 수사와 구속, 사면 따위가 말 한마디, 전화 한 통에 뚝딱 결정되고 뒤집히는 등 무리한 전개도 눈에 띈다. 하지만 현실에서 검찰이 이보다 더 황당하고 기막힌 드라마를 써 주고 있으니 극의 현실성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게다가 BBK 동영상 같은 실제 사건을 슬쩍 버무려 넣은 탄탄한 이야기와 현실에 빗댄 명대사들은 몰입도를 한껏 높인다. 이를테면 이런 대사는 ‘지금, 여기’의 세상을 향해 보란 듯 날리는 펀치 같다. “장관님, 저는 검사입니다. 검사가 따라야 할 것은 청와대의 하명이 아니라 법의 명령입니다.”

요즘 검찰 꼴이 말이 아니다. ‘정치검찰’ 오명의 산실로 지목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간판을 내린 뒤 정ㆍ관계 등 대형 비리 수사는 자취를 감췄다. 더 정확하게는 국가정보원의 가공할 선거개입 범죄 수사로 정권과 대립하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혼외자 논란으로 내쫓긴 뒤부터다. 중수부를 대체한 반부패부가 드라마에선 ‘(더 또는 덜)나쁜 놈들’의 전쟁터라도 되는데, 현실의 반부패부에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공안통’이 득세한다지만 이 바닥도 낯낼 형편은 아니다. 잡으라는 간첩은 못 잡고 국정원의 간첩조작에 놀아나거나(검찰은 몰랐다지만 국정원 직원은 법정에서 검찰도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언론과 극우단체의 ‘종북몰이 놀음’ 장단 맞추기에 급급하다. “대통령 모욕이 도를 넘었다”는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이버 명예훼손을 엄벌한다고 나섰다가 사이버 망명 사태 같은 괜한 분란만 일으켰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관피아’를 뿌리뽑겠다며 빼 들었던 서슬 퍼런 칼은, ‘신출귀몰’ 유병언이 백골로 발견되자 썩은 무 몇 조각만 자르고 칼집에 들어간 지 오래다. 법의 심판을 받은 기업인을 ‘경제 활성화’란 미명 하에 서둘러 풀어주려는 움직임이 공공연한 판국에 재벌비리 파겠다고 나설 대찬 검사가 있을 리 만무하다. 검찰의 꽃으로 선망되던 ‘특수통’이란 말은 머잖아 인사 프로필에도 오르지 않는 사어(死語)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굵직한 비리를 캐던 예전보다 몸은 더 바빠진 듯하다.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에서 흘러나온 하수(下水) 종말처리를 하느라 말이다. 돈만 안 받았다 뿐이지(그럼 뭘 받았거나 받기로 했을까?), 위험하고 구린 뒷일을 닥치는 대로 받아 처리해주는 ‘흥신소’ 노릇과 진배없다. 친절하게도 사건 의뢰에는 종종 ‘가이드라인’이 붙어 온다. 결론은 대략 나왔으니 조각 정보들을 그러모아 그럴듯한 얼개를 만들면 된다. 그래도 명색이 기소독점기관인데, 법전 뒤져 맞춤한 법 조항 찾아내느라 골머리 앓는 수고쯤은 감수해야 한다.

‘흥신소’ 검찰사에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 수사 결과는 시쳇말로 ‘역대급’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권력암투에 액션활극까지 버무린 블록버스터급 드라마의 시놉시스가 실은 찌라시 몇 장이었단다. 같은 찌라시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유무죄가 갈린다는 궤변, 그 궤변이 두려워 누군가는 목숨까지 버린 어이없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치로 풀고 자성과 쇄신으로 다잡아야 할 사안을 번번이 검찰에 떠넘기는 정권에 먼저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한낱 심부름꾼 노릇을 마다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검찰도 공범이다. 맡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한 흥신소에는 더 위험하고 더 구린 일이 몰리는 법이다.

드라마에도 나오는 ‘검사 선서’란 게 있다. 신임 검사들 임관식에서 꼭 읊고, 검찰청사에도 표구해 걸어놨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헛웃음만 나오는 거창한 문구는 접어두자. 부끄러움을 아는 검사라면 이것 하나만 기억하라. “나는 검사입니다. 검사가 따라야 할 것은 청와대 하명이 아니라 법의 명령입니다.”

이희정논설위원 jay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