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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정부에 고마움과 서운함 아직도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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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정부에 고마움과 서운함 아직도 공존"

입력
2015.01.0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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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대결이 치열하던 1960년대, 그것도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무장공비를 살려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한국 정치인도 좌익세력으로 몰아 사법살인을 일삼던 정권 아래서 김신조 목사는 어떻게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남았을까.

김 목사가 살아남은 결정적 이유는 그가 1ㆍ21사태 때 단 한발의 총알도 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당시 인왕산 바윗돌 사이에 무기를 숨긴 뒤 자폭용 수류탄 하나만 들고 홍제동 고개로 빠져 나왔다”며 “숨겨둔 무기의 총신에서 탄약냄새가 나지 않았고 총에 총알이 그대로 장전돼 있던 점 등이 수사과정에서 확인돼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형을 면했다고 해서 무장공비가 곧바로 민간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는 1968년 3월 전향을 결심했다. 김 목사는 “수사관들이 남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 등을 보여주며 ‘한국에서 열심히 장사하면 저들처럼 잘 살 수 있다’고 설득했고, 나도 서울시민들이 평온한 표정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고 밝혔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회장과의 만남도 전향을 결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 목사는 68년 2월 수사를 받던 도중 이 회장의 사무실에서 이 회장과 대화하고 함께 밥을 먹었다. 그는 “북한에서 ‘남조선 대자본가 이병철은 노동자를 착취해서 몸무게가 120㎏이 나간다’고 교육받았는데 실제로 만나본 이 회장은 호리호리한 모습이었다”며 “마음 속에서 ‘100㎏이 넘는 김일성이 오히려 인민의 등을 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권의 정치적 노림수도 한 몫 했다. 김 목사는 “3선 개헌, 10월 유신을 앞두고 중앙정보부가 나에게 중ㆍ고ㆍ대학교, 회사, 군ㆍ시청 등을 돌며 반공국시를 주제로 오전, 오후 각 한 번씩 대중강연을 시켰다”고 말했다.

강연을 하며 사회생활을 이어갔지만 무장공비라는 꼬리표는 늘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1970년 결혼한 아내에게도 ‘공비 마누라’ 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1ㆍ21사태를 배우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름도 김재현으로 바꿨다. 후회와 회환으로 자살까지 생각했던 김 목사를 잡아준 건 신앙의 힘이었다. 1980년 서울 신길동 서울성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1년 년 2월 서울 침례신학대를 졸업한 뒤 한국에 건너온 날을 기억하기 위해 1997년 1월21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40여년이 훌쩍 넘었지만 당시 정부에 느꼈던 고마움과 서운함은 아직도 김씨의 마음에 공존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줬다는 고마운 마음이 크다”면서도 “당시 강사비로 받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서울 정릉동에 사글세 방을 얻어 살았는데 정부에서는 ‘나라에서 집을 줬다’고 말하라고 시켰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돌이켜보면 정권유지를 위해 나를 이용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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