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나온 전문직이었던 강씨
"유복하게 살아와 박탈감 못 견뎌"
절대적 빈곤과는 또 다른 문제로
중년 남성 재취업 어려운 구조
사회적 불안감이 전 계층 확산
중산층 가장은 왜 가족을 죽여야 했을까.
6일 부인과 두 딸을 목 졸라 살해하고 검거된 ‘서초 세 모녀 살인 사건’의 피의자 강모(48)씨에게 드는 의문이다. 비교적 괜찮은 조건을 갖추고도 경제적 어려움 탓에 극단적 선택을 한 강씨의 사례는 ‘상대적 빈곤’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불안 요소로 등장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7일 경찰의 중간 수사결과 강씨의 범행 동기는 경제적 이유가 전부였다. 서울 서초경찰서 관계자는 “강씨는 유서 내용과 119 신고, 조사 과정에서 일관되게 곤궁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가족을 죽였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2년여 전부터 실직 상태에서 거액의 대출(5억원)을 받고 주식투자에 나섰으나 실패한 뒤 처지를 비관해 가족과 삶을 끝내려 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계속되는 생활고로 세상을 등지는 서민층의 범행 동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가족 살해 당시 강씨가 처한 환경을 보면 여느 빈곤 범죄와는 다른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강씨는 서울 강남 한 복판에 146㎡(44평형) 크기의 중대형 아파트를 소유했다. 도주할 때 이용한 차량은 일제 중형차였고, 국산차도 한 대 더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직 뒤에도 씀씀이는 줄지 않아 아내에게 매달 생활비로 400만원씩 대출금에서 빼서 줬다.
게다가 대출금 중 수중에 남아 있는 돈도 1억3,000만원이나 됐다. 시가 11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처분하면 대출을 전부 갚고도 얼마든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셈이다.
이번 사건은 지난해 2월 일어난 ‘송파 세 모녀 자살’과 대척점에 서 있다. 부양의무자 조건에 해당이 안 돼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던 세 모녀는 복지 사각지대의 피해자였다. 반면 강씨의 경우는 지금까지 누려온 강남 중산층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개인의 자괴감이 일가족을 극단으로 내몰았다. 실제 강씨는 경찰 조사에서 “유복하게 살아 온 내 입장에선 견딜 수 없는 힘든 상황”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강씨와 송파 세 모녀 모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최악의 선택을 낳았지만 박탈감의 정도는 확연히 달랐다”며 “앞으로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없는 상대적 박탈감을 강씨는 충분히 빈곤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직업 전선에서 낙오한 중년 남성이 재취업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도 강씨의 열등감을 부추긴 원인으로 지목된다. 강씨는 서울의 명문 사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에너지ㆍ컴퓨터 부품 회사에서 근무한, 번듯한 스펙을 갖췄으나 40대 후반이 된 그에게 취업문은 좁기만 했다. 김경희 노사발전재단 컨설턴트는 “통상 40대 직원을 내보낸 회사는 20~30대로 자리를 채우는 경우가 많다”며 “재취업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 50대와는 다르게 40대는 재취업을 자신하다 계속 불발되면 자신감을 잃고 열패감에 사로잡히기 쉽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강씨 사례가 빈곤과 사회적 불안감이 전 계층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입증했다고 지적한다. 정슬기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재력과 지위로 개인을 평가하는 한국적 문화가 강씨 같은 중산층을 나락으로 이끈 주범”이라고 말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강씨가 개인의 일탈에 그치지 않고 가족까지 살해한 것은?상대적 빈곤이 우리 사회의 독특한 가족주의와 결합할 때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한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이날 강씨 아내와 두 딸을 부검해 모두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1차 소견을 냈다. 경찰은 강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강씨의 영장실질심사는 8일, 현장검증은 이르면 9일 진행될 예정이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