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법흥동(法興洞)의 임청각(臨淸閣)에 가면 그 앞을 가로지른 철로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중종 때 도사(都事)와 형조좌랑 등을 역임한 이명이 중종 10년(1515) 지은 전각이 임청각이니 500년 된 건물이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ㆍ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것이다. 진서(晋書) ‘은일(隱逸)’편의 도연명 열전에 따르면 도연명은 진(晉) 안제(安帝) 의희(義熙) 2년(406) 지금의 강서성 팽택(彭澤) 현령이었다. 군(郡)에서 독우(督郵)를 파견하자 아전이 의관을 갖추고 접대해야 한다고 권했는데 도연명은 “내가 쌀 다섯 말(五斗米)을 위해서 향리의 어린 아이에게 허리를 꺾어 굽실거릴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낙향해서 ‘귀거래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귀거래사’에 “맑은 개울가에서 부(賦)와 시(詩)를 지으리라(臨?流而賦詩)”라는 구절에서 당호를 따온 것이다.
그런데 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ㆍ1858~1932)의 생가이다. 이상룡은 1911년 1월 동생 및 아들 등 전 일가를 대동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이상룡은 압록강 서쪽 대안을 뜻하는 서간도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19년 3ㆍ1운동 직후 서간도의 군정부(軍政府) 총재로 추대되었지만 상해에 임시정부가 결성되자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정부(政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했다. 1925년 임시정부는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인 국무령(國務領)제로 바꾸고 초대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대했다. 이후 국무령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온 그는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일제가 만주까지 장악하자 크게 상심해서 1932년 병사(病死)했다.
일제는 1936년 서울에서 경주까지 중앙선을 놓으면서 임청각을 허물고 철로를 놓으려 했다. 그런데 임청각까지 오려면 직선 철로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 3개의 터널을 뚫고 옹벽과 축대까지 쌓으면서 10여㎞를 구불구불 돌아와야 했다. 그나마 고성 이씨 문중과 안동 유림들이 크게 반발하는 바람에 일부가 살아남아 명맥이나마 유지하고 있지만 바로 앞의 낙동강이 끊어지면서 ‘맑은 개울’이 사라진 것이었다. 일제가 임청각 앞에 중앙선을 놓은 것은 이상룡 일가의 독립의지를 꺾으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상룡이 1932년에 이미 사망했음에도 임청각을 자른 것은 그의 역사관을 영구히 말살시키기 위한 의도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상룡은 망명길에 나서면서 망명 일기인 ‘서사록(西徙錄)’을 썼는데, 여기에 “수사(隋史ㆍ수서)에 이르기를 ‘(수나라 양제가) 좌우 20군(軍)을 현도ㆍ낙랑 등의 길에서 나와서 압록강 서쪽으로 모이라’고 했으니 이에 근거하면 한사군의 땅은 압록강 이서(以西)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서사록’ 1911년 2월 24일)라고 썼다. 마치 일제 식민사관, 곧 조선총독부 사관이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한반도 북쪽으로 비정할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한사군은 한반도 바깥에 있었다고 비정했던 것이다. 이상룡은 또한 “역사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나라의 체통을 높이고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지금 노예사관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있으니 어찌 노예근성을 길러 참담한 지경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고도 비판했는데 노예사관이란 중화 사대주의 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을 뜻한다. 이상룡이 인용한 수서를 비롯해서 중국의 많은 고대 사료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하북성 일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지역까지 고조선 강역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이상룡이 개탄한 노예사관을 극복하지 못한 상당수 사학자들은 지금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조선총독부 사관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최근 춘천 중도에서 대규모 고조선 유적, 유물이 발굴되었다. 20여만㎡의 면적에서 1,400여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고조선 시대의 주거지 917기, 지석묘 101기 등과 고조선동검이라고도 불리는 비파형 동검과 도끼 등이 발굴되었다. 뿐만 아니라 행정구역, 주거지역, 무덤구역 식으로 분포되어 있는 드문 유적이다. 그런데 이런 기념비적인 고조선 유적을 파괴하고 레고랜드 놀이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유적 보존에 앞장 서야 할 문화재청은 상류의 의암댐을 방류하면 유적이 수몰된다는 조사 결과를 근거로 유물을 이전하고 개발을 허용했다는데 이 보고서가 조작이라는 주장까지 대두되었다. 중도 유적지의 높이가 강의 최고 수면보다 높아서 수몰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역사관련 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이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지 보존 및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개발 저지에 나서고 있다. 정부 부처는 설립 목적과 거꾸로 행동하고 일반 국민들이 생업을 제쳐두고 바로 잡으려 나서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정상적인 국민으로 살아가기 너무나 힘든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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