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험하고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올랐더니 눈이 놀랄 풍경이 불쑥 나타났다. 웅장한 바위 봉우리의 연속! 끝없이 이어지더니 하늘과 땅의 경계가 됐다. 어찌나 장쾌한지 보고 있으니 가슴 뻥 뚫리고, 한 해 다시 떠나보낸 먹먹함도 비로소 사라졌다. 이러니 정말 ‘새해’ 같았다. 겨울 바위산의 맨몸뚱이들이 거뭇한 붓질처럼 보이니, 자연이 그린 수묵화가 이것일까 싶었다. 살얼음 낀 물길이 험준한 암봉 사이를 미끈하게 파고 드는데… 돈 주고도 사지 못할 ‘그림’이 충북 단양 제비봉(721m)에 떡하니 걸려 있다. 겨울 다 가기 전에 한번쯤은 봐야할 명작(名作)이다.
● 충주호 굽어보는 천혜의 전망대
충주호 장회나루(유람선 선착장) 찾아간다. 뒤로 우뚝하게 솟은 바위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제비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올려다보면 아찔한데, 이 험준한 바위능선 따라 놀랍게도 등산로가 있다. 정상까지 흙보다는 바위와 돌멩이 밟을 일이 더 많은데다 수직에 가까운 철계단도 수시로 나타나니 채비를 단단히 한다. 최근에 눈 내렸다면 아이젠은 필수, 눈 많이 왔다 싶으면 아예 다음을 기약한다. 정상까지 약 2시간 10분 거리. 왕복 4시간은 예상한다. 중급코스다.
시작부터 급경사의 나무계단.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경고 같기고 하고, 급한 마음 일찌감치 접으라는 충고 같기도 한 이 계단을 한걸음씩 천천히 오른다. 아예 한나절을 이 길에서 뒹굴자고 생각하니 마음 절로 편해진다. 도시로 다시 돌아가면 새해는 이렇게 시작하기로 한다. ‘느리게 가더라도, 마음 편하게…’
제비봉은 월악산 줄기다. 충주호 쪽에서 보면 바위 능선이 제비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모습 닮았다고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연비산(燕飛山)’이라고 소개하며 ‘높고 크고 몹시 험하다’고 적고 있다. ‘연비산’을 우리말로 풀어쓰니 ‘제비봉’이 됐다. 등산로는 제비 날개를 타고 가는 길이다. 봉우리의 동쪽, 남쪽, 북쪽 등 세 방향의 시야가 탁 트인다.
476봉(476m)까지는 전망이 좋으니 풍경 음미하고 바위에 앉아 숨 고르며 쉬엄쉬엄 간다. 처음에는 코앞의 호수만 보이다가 고도 높아지면 구담봉이 보이고 나중에는 제천 쪽 물길까지 아득하게 펼쳐진다.
사위 황량한 겨울이라 바위산의 골격이 오롯하다. 우람한 맨몸뚱이에 침엽수들 아로새겨진다. 멀리서 보니 거대한 수묵화가 따로 없다. 청명한 하늘에 그려진 이 멋진 그림은 색깔이 없는데도 볼수록 고상하고 우아하다. 볕 잘 들지 않은 곳에 몸 붙인 나뭇가지에는 눈꽃이 피었다.
추위에 호수는 유빙 천지. 유람선이 얼음 덩어리를 헤치며 나아가는데 이 풍경이 사는 모습과 참 닮았다는 생각 든다. 지난 한 해도 유람선처럼 꾸역꾸역 얼음을 밀어내며 살았다 싶으니 스스로 대견하다. 앞길에는 큰 얼음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래본다.
제천 쪽으로 향하는 물길이 크게 휘어지는 곳(왼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그 유명한 구담봉이다. 물속에 비친 바위의 모습이 거북 등껍질 닮았다는 봉우리인데 그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은 예부터 숱한 시인묵객들의 풍류의 대상이 됐다. 높이가 330m나 되지만 산 위에서 보니 더욱 등등하다. 여전히 충주호 유람선 관광의 백미인 이유다.
등산로 주변, 작은 소나무들은 눈여겨본다. 바람결 따라 휘어진 자태가 멋지다. 한줌 척박한 바위에 붙어 강풍 피하려는 절박한 몸부림인데 보는 사람 마음이 설레고 또 설렌다.
476봉에서 정상까지는 조붓한 숲길이다. 내린 눈은 여전히 녹지 않았으니 하얀 눈 밟으며 겨울 숲 음미한다. 이파리 다 떨군 나목들이 눈밭에 모여 있으니 제법 볼만하다. 얼음 호수가 나무들 사이로 잠깐씩 모습 드러낸다.
제비봉 등산로 대부분이 훌륭한 전망대다. 각도와 높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겨울산과 호수의 풍경이 눈을 즐겁게 만든다. 한 치라도 더 멀리 보고 싶은 욕심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다보면 어느새 정상이다. 최고의 그림은 단연 이 정상에 걸려있다. 나무데크로 만들어놓은 전망대에 서는 순간 입이 절로 쩍 벌어진다. 티 없이 맑은 풍경에 눈이 깨끗해지고 맑은 바람에 또 가슴 밑바닥 꼭꼭 숨겨진 콩알 같은 생채기까지 절로 아문다.
● 겨울에 더 우아한 도담삼봉과 사인암
단양에 가면 도담삼봉은 본다. 그 유명한 단양8경 가운데 당당히 제1경에 이름 올린 곳이다. 수면 위에 세 봉우리가 뾰족하게 솟은 모양새는 언제 봐도 기이하다. 게다가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봉우리들의 면면이 달리 보이니 이 또한 놀랍다. 시내에서도 멀지 않고 가는 길도 편안하다.
잘 조성된 공원 들머리부터 눈이 호강한다. 얼어붙은 강물 위로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세 봉우리가 마치 흰 쟁반에 담긴 듯 고요하게 떠 있다. 날씨가 더 추워져 얼음이 훨씬 더 단단해지면 ‘얼음강’을 밟고 봉우리까지 다녀오기도 한단다. 가운데 봉우리에 있는 ‘삼도정’이라는 정자가 유독 더 고상하게 다가온다. 주변을 이리저리 거닐며 봉우리의 변화를 천천히 살펴본다. ‘남편이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들이자 아내가 새침하게 돌아앉은 모습’이 보일지 모른다. 정자가 있는 봉우리가 남편봉, 그 왼쪽(북쪽)이 처봉, 오른쪽(남쪽)이 첩봉이다. 첩이 임신한 배를 불쑥 내밀고 남편이 이에 기뻐하며 처는 이를 질투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담삼봉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인연이 깊다. 외가가 단양인데 그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자주 이곳을 찾아 머리를 식혔다. 그의 호인 ‘삼봉’은 도담삼봉에서 땄다고 알려졌다. 강원도 정선 땅에 삼봉산이라고 있는데 큰 물난리로 이 산의 세봉우리가 떠내려 와 도담삼봉이 됐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는 잘 알려졌다. 당시 단양은 이 봉우리들을 소유한 정선에 세금을 냈다. 어린 정도전이 어느날 세금을 받으러 온 정선 관리에게 삼봉이 물길을 막아 단양이 피해를 보고 있다며 도담삼봉을 도로 가져가라 했다. 이후부터 단양은 세금을 내지 않았단다.
도담삼봉 공원 옆 팔각정이 있는 봉우리를 넘어서면 역시 단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석문이 있으니 함께 둘러본다. 구름다리 모양의 거대한 돌기둥이다. 석회 동굴 천장이 무너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런 형태의 돌기둥으로는 동양 최대 규모다. 가운데 구멍을 남한강과 마을 풍경이 액자 속 그림처럼 펼쳐진다.
대강면에 있는 사인암도 메모해 둔다. 약 50m 높이의 절벽인데 색이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사계절 멋지지만, 눈 내리면 더 화려하다. 바위 꼭대기에는 노송이 여백을 메우고 앞으로 남조천이 굽이굽이 흐른다. 추사 김정희는 이 거대한 절벽 앞에 서서 ‘하늘에서 내려 온 한 폭의 그림 같다’며 애를 극찬했다. 사인암 아래쪽에는 숱한 시인묵객들이 스스로 새겨놓은 글귀와 이름들이 빼곡하다. 사인암 가는 길에 있는 청련암이라는 작은 암자도 예쁘다. 천변을 따라 걸으며 웅장한 절벽을 감상하고 옛사람들이 새겨놓은 글씨도 찾아본다.
요즘 단양에는 겨울이 그려놓은 멋진 그림들이 수두룩하다. 이 당당하고 강인한 그림들은 눈이 아닌 가슴에 품는다. 그러면 한 해 버틸 힘이 불끈 솟는다.
● 여행메모
제비봉 등산로는 2개 코스가 있다. 충주호 장회나루 뒤편 제비봉공원지킴터에서 정상에 이르는 장회코스(2.3kmㆍ
편도 약 2시간 10분 소요)와 장회나루 반대편 얼음골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얼음골코스(1.8kmㆍ편도 약 1시간 40분 소요)다. 두 코스는 정상 부근에서 연결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회코스로 정상에 올라 다시 하산하는 회귀코스를 선호한다. 전망이 장쾌하기 때문이다. 종주에 나선 이들은 얼음골에서 장회나루로 넘어오는 것을 선호한다. 시내버스가 얼음골 입구와 장회나루를 운행한다. 겨울에는 산행에 나서기 전 제비봉공원지킴터에서 등산로와 기상상황 등에 대해 알아보고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겨울시즌(11월~이듬해 3월)에는 오후 2시 이후 입장이 제한될 수 있다. 월악산국립공원사무소 (043)654-3251
단양=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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