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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서울시향의 ‘흑역사’

입력
2015.01.0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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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과 폭언 등 인권침해 의혹으로 사퇴 압력을 받아 온 박현정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가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내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열린 사퇴 기자회견 전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성희롱과 폭언 등 인권침해 의혹으로 사퇴 압력을 받아 온 박현정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가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내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열린 사퇴 기자회견 전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문 사회면에서 만나는 오케스트라의 소식은 대개 유쾌한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의 기억만 더듬어도 사회면에 등장한 국내 주요 악단의 사건이 적지 않았다. 지휘자의 자질을 문제 삼은 단원들의 집단행동과 유례없던 정기연주회 취소, 여성단원에 대한 성희롱 발언 의혹으로 자진 사퇴한 예술감독, 오디션 등 인사문제와 관련된 단원들의 집단 반발과 해고 사태, 그리고 차마 지면에 실을 수 없었던 단원들간의 불륜으로 인한 송사들까지.

그러나 얼마 전 일단락된 서울시향 사태는 내용으로 보나 등장인물의 면면으로 보나 앞선 모든 사건을 뛰어넘는, 한국 오케스트라 역사의 ‘역대급’ 사건으로 기억될 것 같다. 하버드 출신에 삼성 임원을 지낸 박현정 대표가 직원들에게 퍼부은 막말은 제3자가 듣기에도 화가 치미는 수준이고, 그가 정명훈 예술감독을 사태의 배후로 지목하면서 야기된 진흙탕 싸움에는 두 거물 정치인(서울시장 재임시절 정명훈 예술감독을 영입한 이명박 전 대통령과 현재 인사권자인 박원순 서울시장)까지 얽혀 보수ㆍ진보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논쟁마저 불붙었다.

서울시향 입장에선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될 이번 사태를 보면서 10여년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객석의 청중으로 목격한 또 다른 서울시향의 ‘흑역사’였다.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지난해 12월 10일 오전 서울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열린 공연 리허설에 참석해 박현정 서울시향 대표의 막말 파문과 관련해 단원들에게 입장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지난해 12월 10일 오전 서울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열린 공연 리허설에 참석해 박현정 서울시향 대표의 막말 파문과 관련해 단원들에게 입장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1997년은 가혹한 시기였다. 그 해 말 터진 IMF 외환위기는 사회 전체를 우울과 절망에 빠뜨렸고, 개인적으론 고통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모르핀’이 필요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음악이었다.

외국 유명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은 그때나 지금이나 목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회 초년병의 얇은 지갑으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대신 1만원 안팎(지금도 서울시향 연주회는 1만원짜리 티켓이 있다)으로 들을 수 있었던 KBS교향악단과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를 거의 빼놓지 않고 찾았다. 베토벤, 브람스, 말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실연으로 듣는 것은 행복했지만, 문외한의 ‘막귀’에도 서울시향의 연주는 형편없었다. 현악 주자들의 활놀림은 일사불란함 대신 제멋대로 파도를 탔고, 금관의 ‘삑사리’는 일상적이었다. 서울시향과 협연한 외국인 연주자는 ‘다시는 이런 악단과 연주하지 않겠다’는 독설을 남기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연주자들의 ‘성의 없음’이 객석에까지 전달될 때는 실망을 넘어 참담하기까지 했다. 공연 때마다 엄청난 양의 초대권이 뿌려졌지만 그래도 객석은 텅 비었다.

그러던 2005년 정명훈 예술감독이 왔다. 이후 서울시향에서 그가 이룬 음악적 성과를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바뀐 사운드는 TV로 치면 14인치 아날로그 흑백 TV를 보다가 50인치 HDTV로 바꿔 보는 느낌이랄까. 연주회 당일까지 널려 있던 티켓은 적어도 일주일 전 예매해야 할 정도로 관객이 몰리기 시작했다. 서울시향 연주회 티켓이 매진돼 돌아가야 했던 경험은 황당하면서도 신선했다. 내 기억 속에 있던 서울시향의 ‘흑역사’는 그렇게 끝났다.

올해까지 계약한 정명훈 예술감독이 내년 이후에도 서울시향과 함께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관객에게 음악으로 위안을 줄 수 있는 지휘자라면 정명훈이건 다른 누구건 상관없다. 다만 지휘자의 거취문제 등에 개입했던 서울시의 기존 행태를 보면 걱정이 앞선다.

1992년 헝가리 출신의 미클로스 에르데이의 영입 결정을 뒤집으면서 서울시가 내세웠던 논리는 비싼 연봉의 상임지휘자를 영입하는 것보다 객원지휘자를 쓰면 비용을 3분의1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03년 곽 승 음악감독을 해임할 때는 1년에 180일로 정해진 출근 일수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정교수(상임지휘자)가 아닌 시간강사(객원지휘자)로 충분하다 생각하고, 공연과 리허설에 집중해야 하는 지휘자에게 출근 도장을 찍게 했던 서울시가 또다시 해괴한 잣대를 꺼내 들까 우려스럽다.

좋은 오케스트라를 만들려면 10년 이상 공을 들여야 하지만 망가뜨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어쨌든 서울시향의 ‘흑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한준규 사회부 차장대우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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