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매주 토요일마다 복권을 산다. 복권 사는 걸 깜박한 날에는 저녁을 먹다가도 8시가 되기 전에 복권을 사야 한다며 뛰쳐나간다. 하지만 한 번도 남편이 복권에 당첨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복권을 산다.
생각해 보니 몇 년 전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도 매주 복권을 사셨었다. 번호들이 적혀 있는 둥그런 판에 화살을 쏴 복권당첨번호를 정하던 시절이었다. 주말이면 복권을 손에 쥐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번호들을 맞추시며 “오늘도 또 꽝이네!”하며 아쉬워하셨지만 다음 주에는 또 어김없이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복권이 당첨되기를 기다리셨다. 내가 본 아버지는 요행을 바라거나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해 뭔가를 기대하는 분이 아니셨기에 왜 복권을 사시는지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일주일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복권을 사신다고 하셨다. 월요일 아침 복권을 사고 나서 일주일 내내 복권에 당첨 되면 뭘 할까 행복한 상상을 하신단다.
남편에게도 그런 생각에서 복권을 사냐고 물었다. 남편은 친정아버지보다 한 수 위였다. 복권을 사는 게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란다. 토요일 날 복권을 산 다음 그날 밤에 복권당첨번호는 확인하지 않고 당첨금만 확인을 한단다. 그리고 한달 뒤에 번호를 확인하는데 그 동안 무한 상상력을 동원해 그 돈을 가지고 뭘 할까를 생각한단다. 이번 주 당첨금은 40억원이고 실제로 받는 돈은 25억원 쯤이라고 마치 자기가 당첨이 된 것처럼 뿌듯해 한다. 이번 주 당첨금으로는 전세기를 빌려 우리가 키우는 강아지 미니를 데리고 세계여행을 가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작년엔가 개그프로그램에서 한 개그맨이 자주 사용해 유행한 “…하기 참 쉽죠? 이잉!”이 생각난다. 이 유행어를 좀 따라하자면 “행복해지기 참 쉽죠? 이잉”이다. 천원 한 장으로, 만원 한 장으로 일주일이, 한 달이 행복하다는 친정아버지나 남편을 보면 말이다.
요즘 여기저기서 모두 살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힘들고, 돈이 너무 많이 들어 결혼을 늦추고 출산도 포기하고, 인구고령화로 생산과 소비가 동력을 잃어 경제성장률도 떨어지고… 자영업자들은 자영업자들대로 월급쟁이들은 월급쟁이들 대로 모두가 힘들다고 한다 . TV뉴스를 들어도 신문기사를 읽어도 온통 암울한 이야기뿐이다. 앞으로 우리의 경제상황이 나아지기보다는 더 어려워질거라는 전망이 압도적이다. 전쟁을 겪고 배고픔을 경험한 어르신들이 볼 때는 지금이 힘들다는 이야기가 모두 엄살로 들릴 것이다. 우리가 이 시대를 암울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비교의 기준, 즉 준거점 때문이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어떤 어르신께서 “요즘은 우리 때처럼 그 지역에서 다 알아주는 뛰어난 인재들이 안 나오는 거 같아! 옛날에는 있었는데”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이야기를 듣고 동년배의 다른 어르신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이런거 아닐까? 나무가 귀할 때는 키 큰 나무가 눈에 띄었지만 그만그만한 나무들이 모두 자라서 커다란 숲을 이루고 나니 이제는 그 키 큰 나무가 그만그만해 보이는 것처럼 말이지.” 과거에는 주위의 작은 나무들 때문에 특별해 보였지만 이제는 작은 나무들이 모두 자라 모두가 특별해지면서 비록 더 이상 특별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들이 모두 특별한 나무들인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어디에 준거점을 두었는지에 따라 똑같은 삶이라도 더 나아졌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더 나빠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비록 더 나빠졌다고 평가받은 오늘이라도 오늘보다 더 못한 어제와 비교한다면 더 나아진 오늘에 기뻐하지 않을까? 당첨되지 않은 복권 한 장으로도 무한 행복해 질 수 있는 게 우리 삶이다. 단지 우리가 복권을 사지 않고 또 상상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행복해지는 것도 준비가 필요하다. 지난 토요일에 나도 남편을 따라 복권을 한 장 샀다. 새해 첫 월요일을 열며 올 한해는 내가 당첨된 복권으로 뭘 할까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참 행복하다.
최현자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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