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새해의 목표와 각오를 다지기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위안에 기대는 게 편해졌다. 신년의 다짐은 어차피 쉽게 잊힐 것이고, 지난 일과 지날 일에 연연하지 않는 게 그나마 인생의 지혜라고 여겼다. 그러나 을미년 새해를 맞으면서, 잊을 뻔했던 지난 2014년이 다시 묵직하게 가슴에 와 얹혔다. 세월호 참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새삼스러운 자각이었다.
새해 첫 날 안산시 단원고 2학년 교실의 풍경은 참사의 비극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희생된 아이들의 책상 위에는 그들을 기리는 사진과 꽃다발, 유품, 인형, 메모 등이 가득했다. 어떤 반은 요즘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다는 허니버터칩 과자 봉지가 책상마다 하나씩 놓였고, 어떤 반은 희생 학생들의 사진을 트리 모양으로 붙여놓았다. 교탁에 선 선생님이 볼 수 있도록 학생들 사진을 모두 앞 칠판을 향해 꽂아둔 반도 있었다. ‘과제: 꼭 돌아오기’라고 쓰인 문구는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단 두 개의 책상만 빼고 모두 꽃다발투성이인 교실에는 이제 다 같이 하늘나라에 있을 그 학생들과 교사의 단체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함께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250명의 친구와 끝까지 아이들 곁을 지켰던 선생님을 그리는 마음이 사무쳤다.
이 광경을 보자니 지난해 봄의 고통과 아픔이 되살아났다. 선원들과 해경이 조금만 일찍 승객들을 갑판 위로 불러내기만 했다면, 어른들의 말을 조금만 더 의심하고 저항했더라면, 저 아이들이 물에 잠기는 그 순간까지 가슴 아픈 휴대폰 메시지와 영상을 남긴 채 수장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며 다시 가슴을 쳤다. 선박을 불법 증축하고 구명정은 펴지지 않았지만 안전검사 책임을 진 그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았고, 기울 정도로 짐을 싣고 평형수를 빼낸 배가 바다에 나섰는데도 운항관리 책임을 진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사실을 보며 기자로서 왜 이런 문제를 알지도 못했을까 다시 책임을 통감했다.
연말 한 방송사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수상을 거부한 탤런트 최민수의 세월호 언급에 희생자 유족들은 깊이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를 많이 잊었거나 심지어 지겨워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만큼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진도 팽목항에서의 실종자 수색작업은 9명을 찬 바다 속에 남긴 채 종료됐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는 철거돼 실내로 옮겨졌다. 일부 일반인 희생자 유족들은 영결식도 치렀다. 그리고 관련 기사가 보도되면 “그만 좀 하자”는 댓글이 심심치 않게 달린다.
세월호 참사는 애초에 충격적인 국민적 비극이었다. 여야가 정치 쟁점화하면서 이념 갈등에 휩싸이고 단식 유족들 앞에서의 폭식 투쟁 같은 논쟁거리가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는 황망한 304명의 희생에 함께 울었다. 선사의 탐욕과 관료와의 유착이 이토록 생명을 하찮게 여길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함께 반성했다. 곳곳에 널린 안전불감증을 이제는 개선해야 한다고 함께 열망했다.
그 일은 이제 시작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는 이달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수명 정도로 그칠 수도 있었을 피해가 왜 300여명으로 커져야 했는지, 선박 운항과 관리가 어떻게 그토록 위험한 지경으로 방치됐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고, 책임을 묻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들을 보살펴 더 이상 비극이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바다에 잠겨 있는 세월호 인양과 남은 실종자 수색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논의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처음에 온 국민이 그러했듯이 아까운 목숨에 대한 연민과 반성,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책무로서 그렇게 해야 한다. 진상을 따지고 책임을 묻는 일은 다시 정치 쟁점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 때마다 인간의 비극을, 희생자들의 사연 하나하나를 떠올려 보자. 바로 이것이 2015년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일이다.
김희원 사회부장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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