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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매기고 독설 내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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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매기고 독설 내뱉기?

입력
2015.01.0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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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진짜 목적은 '개념 독자'를 발명하는 것

MBC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는 1990년대에는 상업성 짙은 음악으로 취급됐던 대중가요가 오늘날 음악계에서 독자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MBC 제공
MBC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는 1990년대에는 상업성 짙은 음악으로 취급됐던 대중가요가 오늘날 음악계에서 독자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MBC 제공

‘무한도전’의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특집을 즐겁게 봤다.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선 탓인지 약간 어색하던 슈가 자리에서 일어나 S.E.S. 시절의 안무를 그때보다 더 잘해낼 때엔 짜릿함마저 느꼈다. 그러다 문득 ‘1990년대의 음악’이 당시 비평의 대상에도 들지 못하던, 소위 ‘길보드 차트’를 빼곡하게 채우던 ‘인기 가요’였음을 깨달았다.

그때 비평은 왜 이 음악을 다루지 않았을까. 당시엔 비평의 역할이 ‘가치 판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90년대는 대중문화 산업이 세분화, 전문화하던 때였다. 그 배후에 자본의 숙성이 있었다. 시장과 자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유기적으로 관계하며 규모를 키웠다. 그 속도의 흐름에서 등장한 ‘신진’ 평론가들은 반자본주의와 공동체주의라는 태도를 관철했다고 본다.

미학적 태도와 사회적 관점이 합리성과 계몽주의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그 맥락에서 90년대의 평론가 다수는 엘리트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당시 한국 사회는 서양처럼 성숙하지 않고 ‘좋은 작품’을 감별할 교양이 부족했을 것이다. ‘씨네21’이나 ‘키노’ ‘리뷰’ 같은 당대의 문화 매체들이 대체로 계몽적 입장을 취한 것은 시사적이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아니 변했다고 하는 건 오해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가 일종의 유년기에 머물렀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식자들의 착각이었을 수 있다. 높아진 학력과 세계 최고 수준의 네트워크 산업을 기반으로 쉽고 빠르게 정보를 취한다. 이때 비평과 감상의 대립은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의 충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비평은 잘난 척하는 것, 가르치려 드는 것, 대중적인 것에 대한 무시 등으로 이해됐다.

따라서 최근 영화나 음악을 다루는 매체에서 기자가 자주 등장하는 건 자연스럽다. 비평보다 가이드가 더 매끈하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쟁도 그렇다. 많은 사람이 영화를 영화로, 음악을 음악으로만 보라고 주문하는 것은 비평에 대한 불신과 불쾌함 탓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독립적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 점에서 맥락이 중요하다. 맥락은 늘 위치와 관점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최근 90년대 음악의 재조명과 ‘국제시장’의 색깔 논쟁 같은 것을 보면서 새삼 비평의 무용함을 떠올린다. 비평은 주체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주체성을 가지는 것은, 자신이 오직 소비만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존재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척척 돌아가는 시스템에서 자기결정권을 가지는 것, 그것을 위해 공부하고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이 아닌가. 내 입장에서는 그게 바로 비평적 관점이자 태도다. 그런데 이 관점이 흔들린다. 쓰는 쪽이나 읽는 쪽이나 비평이 그저 별점을 매기는 것, 독설을 내뱉는 것, 작품이나 곡의 제목이나 알려주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비평’ 자체가 난센스나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는 것 같다. 이것을 직업으로 둔 사람으로서 다소 난감하고 억울하다.

이에 대해 꽤 오래 고민하고 있다. 일단은 비평적 관점을 더 다듬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지금 비평에 씌워진 오해는 대부분 비평의 주체들 탓이다. 그들은 글을 다듬는 것을 소홀히 했고 통찰력을 키우는 데 실패했다. 좋은 관점이란 성찰적 태도와 포지션에서 나온다. 그걸 이해하지 못할 때 글쓰기는 기술 영역에만 머물 것이다. 작품이 작품으로만 존재할 리도 없다. 90년대의 가요가 중요한 까닭은 어떤 노래는 노래 이상의 가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대중문화다. 따라서 맥락과 정보, 요컨대 콘텍스트와 메타 데이터를 그 대상과 긴밀하게 엮지 못한다면 비평 혹은 비평적 글쓰기가 대체 무슨 소용일까. 그 겹침의 깊이가 비평(가)의 심도를 보장할 것이다. 이때 비평의 역할도 재설정될 필요가 있다.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비평의 목적일까. 아니라고 본다. 비평의 진짜 목적은 주체적인 독자를 발명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 독자는 발견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다. 이로써 비평가와 독자는 긴장을 만든다. 힘(에너지)은 바로 이 긴장의 균형에서 발생한다. 2015년의 바람이 있다면 이것이다.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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