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의 재위 32년(1895년)도 항목에는 11월 16일까지의 기록밖에 없다. 곧바로 재위 33년(1896) 1월 1일 기록으로 넘어간다. 11월 17일부터 새해까지는 아무 일도 안 한 것일까? 아니다. 고종은 그 해 11월 15일, “정삭(正朔)을 개정해서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할지라. 개국 505년으로 시작해서 연호를 세우되 일세일원(一世一元)으로 제정해서 만세 자손이 조심해서 지키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고 연호를 사용하라는 명령이다. 대한제국 때의 사학자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고종이 ‘정삭(正朔)을 개정해서 금년(1895) 11월 17일을 (조선) 개국 505년 1월 1일로 한다’는 조서를 내렸다”고 덧붙이고 있다. 정(正)은 한 해의 시작(歲之始)이고, 삭(朔)은 한 달의 시작(月之始)을 뜻하니 정삭을 개정했다는 말은 1월 1일을 바꿨다는 뜻이다. 음력으로 고종 32년(을미년) 11월 17일이 양력으로 조선 개국 505년 1월 1일이 된 것이다. 양력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을 한 해로 삼는 반면 음력은 달이 비었다가 다시 차는데 걸리는 시간을 달로 삼는 역법(曆法)이다. 음력 12달은 1태양년보다 약 11일이 짧기 때문에 간혹 윤(閏)달을 끼워넣는 데 ‘19년 7윤법’이라고 해서 19개년에 7개의 윤달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
같은 날 내각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이 건양(建陽)이란 연호를 제정해 올렸다. 조선도 비로소 명ㆍ청(明ㆍ淸)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일세일원(一世一元)이란 한 임금 재위 중에는 하나의 연호만 사용한다는 뜻이다. 고종은 불과 2년 후(1897년) 8월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고쳐서 자신이 정한 일세일원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는데,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애초의 양력 사용과 연호 제정이 백성들에게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수천 년 간 사용해오던 음력을 하루아침에 양력으로 바꾸라니 백성들이 어리둥절한 것은 물론이다. 연호 제정도 뜻은 좋지만 조선을 청(淸)과 떼어놓기 위해서 일본이 종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빛이 바랬다. 석 달 전의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었는데도 고종은 일본인들의 압력에 따라 왕비를 서인으로 폐(廢)한다는 조서까지 내렸다. 게다가 양력 개정을 선언하면서 단발령까지 함께 내렸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유길준(兪吉濬)과 조희연(趙羲淵) 등이 일본인을 인도해서 궁성 주위에 대포를 둘러 설치하고 ‘머리를 깍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고 위협했다”고 전한다. 고종이 길게 탄식하면서 조병하(趙秉夏)에게 ‘내 머리를 깎으라.’고 말해 조병하가 가위로 고종의 머리를 깎고, 유길준이 태자의 머리를 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단발령이 더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우리 역사에서 양력 사용은 이처럼 순탄하지 못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정삭(正朔)을 개정한 것처럼 1월 1일은 인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사기-은(殷) 본기’에는 “(은나라) 탕(湯) 임금이 정삭을 개정했고, 복식(服飾)의 색깔을 바꾸어 흰 색을 숭상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흰 색을 숭상했다’는 말이 주목된다. 고대 동양사회에서는 왕조가 바뀌면 정삭을 바꾸었다. ‘춘추좌전(春秋左前)’ 은공(隱公) 원년 조에는 “하(夏)나라는 인월(寅月)을 정월(正月)로 삼았고, 은(殷)나라는 축월(丑月)을 정월로 삼았고, 주(周)나라는 건월(建月)을 정월로 삼았다”는 말이 있다. 인월(寅月)은 음력 정월을 뜻하고 축월(丑月)은 음력 섣달을 뜻하고, 건월(建月)은 음력 11월을 뜻한다. 은나라의 정월은 하(夏)나라의 12월이었고, 주(周)나라의 정월은 하나라의 11월이었다는 뜻이다. 또 진·한(秦漢)의 정월은 하나라의 시월이었다. 음력은 그 종류도 많았는데, ‘고육력(古六曆)’이라 하여 황제력(皇帝曆), 전욱력(?頊曆), 하력(夏曆), 은력(殷曆), 주력(周曆), 노력(魯曆) 등 여섯 가지의 역법(曆法)을 들기도 한다.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 부여(夫餘)조’에는 부여사람들이 “은(殷)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 안에 큰 대회를 열어서 날을 이어가면서 술과 음식을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를 영고(迎鼓)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부여는 동이족의 은나라 정월을 정삭(正朔), 즉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아서 며칠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다. 같은 기록은 부여 사람들이 흰 옷을 숭상했다고도 나온다. 부여는 은나라의 정삭과 흰 색 숭상 전통까지 그대로 계승했던 나라였다. 새해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남긴 유산(遺産)과 함께 옴을 알 수 있다. 120년 전의 을미년은 왕비 시해 등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올해의 을미년은 개인과 나라의 운이 융성하는 한 해가 되도록 기원하고 또 노력해야겠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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