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갔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군기교육대로 가던 날 부대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별 대단한 잘못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연대장이 군기교육대의 활성화(?)를 시도한 시기에 눈치 없이 중대장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열흘 남짓 있었던 군기교육대에서의 일과는 소총 메고 하루 종일 연병장을 걸은 후 반성문 수십 장을 쓰거나 작업지원 나가는 등 한가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 관계 전공을 했다는 이유로 작전과의 긴급호출을 받은 나는 수박에 번호를 쓰는 ‘임무’를 수행했다. 연대장 보다 몇 끗발 센 연대장의 부인이 ‘관사 앞에 심은 수박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다’고 하여 그 분이 출입할 때 잘 보이는 방향으로 수박의 방향을 돌린 후 흰색 페인트로 1번에서 200번이 넘도록 정성 들여 숫자를 쓴 것인데 한여름이라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그때 수고 했다고 하사 받은 ‘써니텐’ 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여러 부대의 군기 빠진 녀석들을 모아 놓았으니 계급 같은 건 따지지 않고 대강 어울려 지냈고 밤이면 울타리 넘어 가게에서 몰래 가져온 술도 마시곤 했으니 당나라 군대가 따로 없었다. 자대보다 몸과 마음이 편했는데 제일 좋은 것은 야간근무가 없다는 점이었다. 깊이 잠들었다가 흔들어 깨우면 억지로 일어나 군복입고 총 들고 근무서는 일이 고역이었는데 군기교육대는 불침번 초번만 근무서는 척하다 아침까지 내리 그냥 자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부터 비가 많이 오던 날 밤의 일이다. 한참 자고 있는데 내무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십여 명의 병사들이 거칠게 들이닥쳤다. 판초 우의와 총에서 빗물이 줄줄 떨어지고 있었고 그들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와 열기는 마치 군기교육대 내무반에 성난 짐승 십여 마리가 들어온 듯했다. 그들은 우리의 머리맡에 부동자세로 서 있었고 영문 모르는 우리는 모포 위로 눈만 내놓은 채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요란한 군화소리와 함께 불이 켜지더니 연대 주임상사의 까칠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대 주임상사가 원래 논리적인 사람이 아닌데다가 화가 나서 윽박지르니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한참 듣다보니 조금씩 전모를 알게 되었다. 야밤에 비를 흠뻑 맞고 이곳까지 달려온 병사들은 우리 사단의 사격선수들이었다. 이들은 체육특기자 등 전문사격선수들이 아니라 입대 후 사격측정에서 우수자로 뽑혀 신병교육대에 있는 훈련장에서 사격선수로 근무하는 일반 사병들이었다. 사격선수는 훈련과 작업에서 열외 되는 등 이른바 ‘꽃 보직’이었는데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것이 궁금했다. 좀 더 들었더니 그날 20여 부대가 출전한 사격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우리 부대가 꼴찌를 했단다. 주임상사의 잔소리는 집요했고 이런 경우 대개 그렇듯이 유치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어떻게 고기 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야!” 사격선수들이 고된 연습에 지쳐 고기 먹고 싶다고 했나 보다. 그래서 돼지고기 몇 근 사준 것을 걸고 넘어진 것이다. 잠든 척 하느라 미동도 없이 누워 있으려니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숨은 가빠오지만 준엄한 훈계는 끝이 없었다. 어쨌든 사격선수들이 사격장에서 연대 본부까지 10여 ㎞를 억수같은 비를 뚫고 구보로 왔음을 알게 되었는데 주임상사는 마지막에 한 술 더 떴다. “신교대까지 구보로 간다!”는 호통에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판초 우의가 살짝 흔들렸다. 잠시 후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그들의 애잔한 뒷모습을 보노라니 연대 본부에서 신병교육대까지는 20㎞가 넘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군대에서 2등은 없다”는 말은 입대 직후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러나 아무나 1등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20여개 부대가 출전했는데 1등부터 꼴찌까지 성적이 나오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꼴찌 했다고 막무가내로 괴롭히기만 한다면 패자부활전이나 역전의 감동은 영영 불가능할 뿐이다. 못난 자식 아니 한번 실수한 자식이라고 내 자식이 아닐까. 경남FC가 K리그 클래식에서 성적부진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되자 당장 팀을 해체한다고 했다가 이젠 회생의 기미가 보인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떠오른 기억이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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