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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힘을 맹렬히 믿었던 '독립출판'의 정신적 지주

입력
2014.12.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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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서 일하며 문학 공부

대학 진학 후 출판 열정 키워

美 독립출판사 빅5로 성장

e북의 공세 등 출판환경 악화

앨런 콘블럼은 독립 문학출판인으로서의 성공 여부를 묻자 "성공의 정의가 뭐냐"고 "구텐베르크도 파산했는데 그는 실패자냐"고 반문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낸 출판인 실비아 비치가 비록 사업은 망했어도 훌륭한 출판인으로 기억되듯이, 콘블럼은 사업적 성공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믿고 또 실천했던 출판인이었다. 사진 출처 Coffeehousepress.org
앨런 콘블럼은 독립 문학출판인으로서의 성공 여부를 묻자 "성공의 정의가 뭐냐"고 "구텐베르크도 파산했는데 그는 실패자냐"고 반문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낸 출판인 실비아 비치가 비록 사업은 망했어도 훌륭한 출판인으로 기억되듯이, 콘블럼은 사업적 성공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믿고 또 실천했던 출판인이었다. 사진 출처 Coffeehousepress.org

커피하우스 프레스(CoffeeHouse Press)는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시의 작은 비영리 문학전문 출판사다. 1984년 문을 열어 이제껏 400종 남짓 책을 냈는데, 모두 그 안 팔린다는 시집과 소설, 논픽션이다. 발행인 겸 에디터를 포함해서 상근 직원은 14명. 근년 전자책 발간을 시작하면서 대폭 증원한 게 그 규모다. 노벨상이나 퓰리처상, 전미도서상 같은 이름난 상을 탄 작가의 판권은 하나도 없다. 알려진 작가의 책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는데, 물론 첫 책으로 호평을 얻고 후속작을 낸 예는 있다. 연 시장규모 300억 달러(2011년 306억 달러) 규모인 미국 출판시장에는 매년 약 50만 종의 책이 쏟아진다. 그 중 약 60%를 하퍼콜린스, 아셰트 등 소위 ‘빅5’출판사들이 내고, 나머지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혹자는 1만 개가 넘는다고도 하는 중ㆍ소 독립 출판사들이 낸다. 미국 독립출판인협회(IBPA) 유료 회원사는 2012년 현재 약 3,000개. 커피하우스 프레스는 그러니까, 저 3,000개 출판사 가운데 한 곳이다.

하지만 미국 출판업계에서 커피하우스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거대자본의 지배에 맞서 출판문화 다양성을 지키면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전위로서, 저 많은 중소 출판사들이 지지하는 어떤 가치의 정신적 보루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커피하우스와 그 전신인 ‘Toothpaste Press’를 만들고 42년 동안 이끌어온 출판인 앨런 마크 콘블럼(Allan Mark Kornblum)이 11월 23일 지병으로 숨졌다. 향년 65세.

2008년 온라인서점 아마존이 미국 주요 출판인들을 초청해 디지털 출판과 e북의 시장 전망을 주제로 대규모 프리젠테이션을 열었다. 기술적ㆍ상업적 고려가 우선된 행사였던 만큼, 참석자들의 분위기는 대세 순응적이었는데, 콘블럼이 발언권을 얻더니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 우리가 책을 만들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고심하고 있는 디자인은 새로운 디지털 형식에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존 측은 e북에서 디자인은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미국의 저명 출판 칼럼니스트로 블로그 ‘WritersCast’를 운영하고 있는 데이비드 윌크는 콘블럼이 불퉁해진 얼굴로 털썩 앉으며 “디자인에 대한 관심의 결핍은 e북 독자와 독서 전반에 두고두고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독서의 마법은 독자와 글의 상호작용 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고 자신의 블로그에 썼다. 내용 못지않게 책의 형식이 독서에, 독자와의 교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게 콘블럼의 생각이었다.

그는 e북의 혁신적 의미를 누구 못지않게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현 사회 경제적 환경에서 또 장대한 책의 역사 속에서 e북은 진화의 한 요소일 뿐 혁명적 계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1450~1600년 르네상스의 출판인들이 책을 인쇄하면서 창조했던 가치와 혁신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종이 책이 전자 책의 속도와 경쟁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출판인이라면 우리가 지금 만들고 또 믿고 있는 책의 다른 가치들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2011년 2월 작가이자 비평가 아니스 쉬바니와의 인터뷰에서 그 생각의 일부를 오늘날 거대 출판자본의 행태와 비교하며 이렇게 소개했다.

-르네상스의 출판인들은 책의 힘, 즉 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맹렬히 믿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돈이 될지 안 될지를 우선적으로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나요?

-1,000권의 책은 화재나 홍수가 나고 전쟁이 나도 그 중 일부는 어딘가에 어떻게든 살아남습니다. 내겐 그렇게 살아남은 오래된 책들이 있습니다. 과연 e북이 50년 뒤 100년 뒤에도 지금처럼 읽힐까요?

-컴퓨터 인터넷 안정적인 전원…, 책에는 그런 게 필요 없습니다. 책은 중고도 있고, 도서관에서 공짜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정보화시대의, 책(지식 교양)을 둘러싼 새로운 빈부격차를 우려합니다.

-멋지게 디자인되고 잘 인쇄 제본된 책들은 그 자체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2006년 인터뷰에서 콘블럼은 진흙 서판에서 두루마리, 양피지, 인쇄술, 그리고 등사에서 활판- 옵셋- 컴퓨터 편집에 이르는 장구한 출판 역사를 반추한 뒤 “진보는 필요하고 그것이 사회적 선(善)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진보가 거듭될 때마다 책의 매력이 조금씩 감소한 것도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요지는 e북이 다가 아니고 빠르게 편한 게 다가 아니라는 것, 한 마디로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거였다.

앨런 콘블럼은 1949년 2월 16일 뉴욕 맨해튼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60년대 뉴욕 반(反)문화 정서와 미술 음악 문학 등 전 문화영역에서 전위적인 도전들을 이끌어가던 ‘뉴욕파(Newyork School)’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꿈은 시인이 되는 거였다. 뉴욕 중앙우체국 직원으로 하루 3교대로 일하면서 그는 시를 썼고, 이런저런 문학교실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1969년 12월 어느 날, 문학강사가 한 문학 잡지사 관계자와 함께 원고 뭉치를 들고 와서는 수강생들에게 교열을 부탁했다고 한다. 스무 살의 콘블럼은 자기 몫의 원고를 다 본 뒤 잡지사 사람에게 주뼛주뼛 다가가 ‘내 원고도 좀 봐줄 수 없겠느냐’고 청했다가 모욕적으로 거절을 당한다. ‘그래? 그럼 내가 만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선의의 격려보다 냉정한 거절이 훨씬 생산적일 수 있다는 교훈을 거기서 얻었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1970년 7월 그는 아이오와대에 진학했고, 한 달여 만에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모아 생애 첫 책(팸플릿)을 만든다. 그의 ‘Toothpaste magazine’은 그렇게 시작됐다. ‘치약 잡지’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21살 청년의 치기와 반항기에도 불구하고 출판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예사롭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9월에 곧장 타이포그래피 강좌를 신청했고, 활판 인쇄 기술을 익히면서 서서히 활자의 매력, 출판의 미학에 빠져 들어간다. 그해 말 그는 자신의 습작 시를 인쇄한 첫 활판본 교정쇄를 본 순간의 감흥을 “마치 새로 태어나 처음 보는 빛 같았다”고 말하곤 했다. 73년 가족의 도움으로 집을 얻고, 결혼도 하고, 중고 등사기를 구입한다. 이후 약 10년간 그는 인쇄와 디자인을 익히며 활판본 책 70여 권과 다수의 소책자, 홍보 포스터 등을 만들었고 위탁 출판도 해낸다. ‘치약’의 책들은 그가 아내와 함께 지역 문인과 뉴욕 문단의 무명 작가들이 보내온 원고를 읽고, 고르고, 교열하고,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인쇄하고, 심지어 제본까지 한 것들이었다.

그가 마케팅과 회계를 익힌 것은 83년 무렵부터였다. 활판 인쇄로서는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다는 판단, 그의 출판은 진지한 도전과 성취를 바라는 작가와 독자 대중을 위한 출판이 아니라 소수의 희귀본 컬렉터를 위한 출판이었다는 깨달음, 한 마디로 직업 출판인으로서 올바른 길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1984년 ‘Toothpaste Press’를 접고 ‘커피하우스 프레스’를 설립한다. 미니에폴리스의 미네소타 북아트센터 건물 1층의 작은 공간에 문을 연 레지던시 출판사였다. 그가 미니에폴리스를 선택한 것은, 미네소타주 특유의 중소 문화산업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미네소타주의 모든 문화재단은 예산의 일정 비율을 중ㆍ소규모 문화산업의 몫으로 의무 할당해야 한다. 이 제도는 기성 집단과 신생 집단의 경쟁을 촉진하고 거대 문화집단의 혁신을 자극함으로써 전체 문화예술 생태계의 건강성을 북돋우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커피하우스는 ‘치약’ 시절부터 해오던 활판 인쇄를‘모닝커피 챕북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이어가는 한편 고급 활판본도 제한적으로 만들면서, 대중적으로 판매할 문학서 발간에 주력한다. 그의 디럭스 활판본들은 미국 그래픽아트위원회가 선정한 ‘올해의 최고 디자인 도서 50’에 다수 선정됐다.

예술과 경제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출판이라면 독립출판은 거기에 독자적인 지향과 가치, 즉 ‘운동’의 의미를 얹는다. 대자본의 지배력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유지한다는 소극적 의미의 독립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보편적 경향에 맞서 나름의 가치와 개성을 구현하고 연대ㆍ확산하겠다는 적극적인 선언인 셈이다. ‘예술과 경제’만도 버거운 현실에서 ‘대중적 경향’과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그의 길이 순탄했을 리 없다.

커피하우스가 고집해온 장르는 시와 소설, 문학적 논픽션이다. 그리고 미네소타 지역의 무명 작가와 여성작가, 특히 아시아 등 소수민족ㆍ인종 작가의 작품들을 편파적으로 발굴해왔다. 콘블럼의 지향은 문학을 통한 차이와 다양성의 구현이었다. 이란 소설로 2010년 미국 내셔널북어워드 최종심에 오르면서 일약 유명 작가가 된, 무명의 일본계 미국인 작가 캐런 테이 야마시타의 데뷔 사연을 소개한 뒤 콘블럼은 “캐런의 조부모와 외조부모는 모두 일본에서 이민 온 이들이다. 나는 그가 지닌 작가적 재능과 국제적 감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독자적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기회를 그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 해 15~20권의 책을 내는 커피하우스에는 기성 작가의 원고와 그들의 추천 원고뿐 아니라 약 3,000여 건의 공모 원고가 매년 접수된다. 그것들을 읽고 선별하는 게 콘블럼과 피시바흐 수석에디터(현 발행인), 편집장 버드의 일이었다. 커피하우스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들이지만 서로의 판단이 엇갈릴 때도 잦다. 그럴 때 신뢰가 빛을 발한다. 그들에게는 각자 1년에 한 권씩, 나머지가 마뜩찮아 하는 책을 출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 또한 다양한 관점과 미학을 수용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전통이다. 콘블럼은 “만약 우리의 모든 작가들이 하나의 미학을 대변한다면 그들끼리 모여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우리 테이블에는 끝없이 다양한 작가와 작품 스타일이 놓일 수 있어야 한다. 끝없이 리필되는 신선한 프렌치 로스트 커피와 함께 말이다.” 콘블럼은 문학만큼 커피를 즐겼고, 그래서 출판사 이름도 ‘커피하우스’가 됐다.

콘블럼은 원고를 읽지 않을 땐 역사서를 읽었다. 그는 정치인과 종교인들이 미국의 정체성과 역사, 헌법의 의미를 천편일률적으로 선전해대는 것을 비판하며 “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마치 초등학교의 추수감사절 퍼레이드처럼 뻔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인의 성격은 호레이쇼 엘저(Horatio Algerㆍ동화작가)의 등장인물보다는 한없이 다양하고 복잡하고 모순적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캐릭터들에 더 가깝다. (…) 독립출판을 비롯한 소규모 출판의 원칙과 역할 가운데 하나도 소수자의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꾸는 데에 있다.”(2006년 인터뷰)

비영리기업인 커피하우스는 미국의 문학 인디출판사로는 빅5에 든다. 2011년 매출은 약 100만 달러. 그 절반이 스테디셀러, 이른바 Back-list에서 나온다. 이제 커피하우스에는 내셔널북어워드 최종심에 오른 패트리샤 스미스(시인) 캐런 야마시타(소설), 2012 퓰리처상 최종심의 시인 론 패지트, 아메리칸북어워드 수상자 매튜 쉬노다, 유코 타니구치 등 쟁쟁한 베스트셀러 작가 10여 명이 속해 있다.

미국의 시집 가운데 약 99%는 독립출판사들이 낸다. 대형 출판그룹들이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미 있는 문학적 실험과 혁신이 대부분 독립출판을 통해 이루어지고, 또 그래서 장부가 보조금을 주고 시민들이 기부도 한다. 악화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 2011년 바통을 이어받은 인턴 출신의 신임 발행인 크리스토퍼 피시바흐는 “(언제나 그랬듯) 미국 독서시장의 미래는 아마존이나 반스앤노블 애플 구글이나고, BEA(book expo America)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패널리스트가 아니라 오직 독자와 작가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저 말을 할 때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이고 또 아버지 같았다는 콘블럼의 말- “나는 독자들이 책(문학)을 읽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기 때문이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콘블럼은 2006년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로도 쉬지 않고 출근했고, 발행인 직을 물려준 뒤 선임에디터로 일했다. 11월 23일 미니에폴리스 자택에서 숨을 거둘 때, 그의 아내 신디는 존 콜트레인의 노래 ‘Love Supereme’을 배경으로, 콘블럼이 사랑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 ‘The Descent(내리막)’을 낭송했다.

(…)

The descent made up of despairs

And without accomplishment realizes

A new awakening which is a reversal of despair

For what we cannot accomplish,

What is denied to love,

What we lost in the anticipation a descent follows,

Endless and indestructible

이루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고 기대마저 저버린 모든 절망의 내리막이 실은 그 절망을 뒤엎을 전복의 계기임을 그는 믿었던 듯하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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