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이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 때 친구 자취방을 찾아간 적이 있다. 마침 그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부모님이 올라와 계셨다. 주로 삼 농사를 짓고 있던 그분들은 이렇게 한 번씩 오시는 걸 큰 낙으로 삼고 계셨다. 아버님은 우리랑 같이 한잔 하셨고 어머님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이야기가 무르익다 보니 남편에 대한 어머니의 푸념이 나왔다.
“농사를 져서 100원을 벌었다고 치자. 그러면 이 양반은 그것을 가만히 못 봐. 어떡해서든 까먹고 말지. 그렇게 할 바에야 100원 모두 홀랑 까먹어버리면 나도 좋겠어. 세간살이 탕탕 때려 쪼사불고 나 살 길 씨언하게 찾아가믄 되니께. 근디 이 양반은 꼭 20원을 냉겨놔. 기가 막히게도 그 돈은 절대 안 써. 그것 때문에 내가 마지못해 살어. 그래서 지금까지 온 거여, 사람이 마지못해 살 수 밖에 없게 귀신같이 맞춰 논다니께.” 우리와 아버님은 웃었는데 어머님은 화제가 다른 것으로 옮겨가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웃으셨다.
20대 중반, 나는 여수 바닷가에서 패류 가공처리 일을 했다. 주로 홍합이었는데 양식장에서 사다가 씻고 삶고 깐 다음 어떤 수산회사에 납품하는 구조였다. 그 수산회사 부장이 수시로 들러 가공 상태를 살펴본 다음 단가를 조정하곤 했다. 여러 달 지나자 우리를 대하는 수산회사의 기준과 판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원재료 가격과 작업비용을 훤히 읽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준 대금은 많이 벌리지는 않지만 포기하기는 아까운, 마지못해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는 마지노선이었다. 그 덕에 나는 바닷물에 젖어가며 일을 계속 해야 했고 그들은 납품 받아 더 큰 회사에 보내기만 하면 됐다.
나는 동년배 중에서 키가 큰 편이다. 간혹 KTX를 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곤란을 겪는다. 의자가 작고 좁아 불편한 것이다. 더 작아 버리면 아예 포기할텐데 역시나 마지못해 탈수밖에 없는 그 마지노선에 의자 크기를 맞추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일본에서 신칸센을 탔을 때는 단순하면서 크기가 넉넉한 의자가 인상적이었다). 왜 이렇게 좁게 만들었냐고 항의조로 직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의자를 하나라도 늘려서 더 많은 분들이 타고 다니시면 좋잖아요.” 이게 대답이었다. 직원인들 무슨 죄가 있겠는가. 회사 측에서 그렇게 대답하라고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엊그제 부산에서 KTX 타고 서울로 가는데 그 얄미운 대답이 새삼 떠올랐다. 약간의 불편을 참아 더 많은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자는 것에는 반대의사 없다. 다만, 그게 진심이 아닌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게 문제다. 당장, 이동판매 커피 중에 가장 싼 게 3,800원이었다(이 또한 ‘마지못해’에 맞춘 절묘한 액수 아닌가). 가격을 좀 낮추어 더 많은 사람이 마실 수 있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뱃값 인상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건강을 위해 값을 올린다는 말을 나는 전혀 믿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대부분 그럴 거라고 본다. 경고사진을 끝내 안 넣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금연 시도자와 세수확대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올려야 최대한 많이 벌어들일까를 고민했고 2,000원이면 마지못해 사 피울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더 올리거나 무서운 사진을 넣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끊어버리면 안되니까. 이른바 이윤의 극대화. 국가가 회사로 변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더군다나 새 담배 포장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해서 나를 포함한 불쌍한 납세자들을 눈치 보며 한 두 갑씩 사재기하는, 때로는 한 갑 가지고 주인과 말싸움까지 하는 쩨쩨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을’의 처지와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써먹는 ‘갑’의 모습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정교하고 견고해져 간다. 최저임금이 그렇고, 턱도 없는 수습이나 인턴제가 그렇고, 11개월로 계약하는 비정규직이 그렇다. 마지못해 그거라도 하게 만든다. 기생충은 숙주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산다. 그러나 너무 빨아먹으면 숙주가 죽어버리기에 결코 어떤 선을 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지못해 공화국’에서 마지못해 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못해 사는 인생에서 행복의 징조를 찾을 수 있을까.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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