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일어나고 잠깐 유럽연합(EU)에 관심을 가졌다. 문제는 미국에서 터졌는데 정작 유럽에서 더 큰 타격을 받은 듯 보이는 게 흥미로웠다. 하나같이 EU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인가? EU는 실제로 곧 망하게 되는가?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뉴욕타임스에 쓰는 칼럼들에 따르면 그러했다. 미국의 매체들은 대체로 비슷한 논조였다. 과장하자면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연합체가 여전히 망하지 않고 존속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같은 시기 나는 영어회화 수업을 들으러 영국문화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커런트 어페어’ 시간에는 자주 경제뉴스가 주제로 등장했다. 어느 날 강사가 한 신문의 만평을 화면에 띄웠다. 그리스와 독일이 하나의 밧줄에 묶여 있는 채로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만평에 따르면 독일은 살아남기 위해 그리스를 떼어버리거나 혹은 그리스와 함께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생겼다. 강사가 보여준 또 다른 기사는 독일의 경제적 번영에는 EU의 화폐통합정책이 큰 역할을 했으므로 독일이 이번 사태를 앞장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몇 가지 기사들을 소개한 뒤 강사가 우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럽연합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질문하는 그 영국인 강사에게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의 태도가 느껴졌다. 엄밀히 말해 우리 영국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랄까?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유럽을 여행할 때 마주친 EU에 대한 기억은 긍정적이다. 남부유럽의 어떤 도시는 EU에 가입된 뒤 젊은이들의 유입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고 했다. 3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며 도시들을 떠돌던 루마니아 출신의 한 젊은이에게 국경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연합과 도시들이 존재할 뿐.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유럽의 하나됨에 대한 확신이 묻어났다.
EU에 대한 호기심은 시간이 지나며 차츰 사그라졌다. 물론 명확한 답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여전히 신문의 국제면에는 EU에 대한 암울한 기사가 등장하고,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나를 진짜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미래의 불투명함이나 그에 대한 상반되는 입장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선명한 확신이다.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찬 말들을 늘어놓을 수가 있을까. 아니 단지 미래뿐이 아니라, 그리고 각종 매체들의 논평을 넘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온갖 주제에 대해서 꽉 찬 확신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아니 일방통행의 수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모두가 유능한 변호사에게 코치를 받고 있는 피의자들처럼 행동한다. 무조건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십시오. 상대에게 유리한 발언을 삼가십시오. 당신에겐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옳음과 결백을 주장하는 목소리들 앞에 설 때마다, 반대로 더 모호하고 의뭉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된다. 큰 사건이 일어날 때면 특히 그렇다. 격앙된 목소리들이 행동을 촉구한다. 그것은 즉각적인 ‘예’만을 대답으로 원하는 명령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원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정보와 정보들을 고려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의 뉴스들은 정보라기보다는 주장에, 아니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자극에 더 가깝다.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전문가 멘토들 같기도 하다. 사기꾼같지만 한편 귀가 솔깃하다. 하지만 듣고 나면 어리둥절하다.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럴수록 더 확신에 찬 목소리들에 중독된다. 자꾸만 더 크고 선명한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간다. 그럴수록 더 확신을 잃는다. 생각은 안되고 의심은 늘고, 비겁해진다. 그럴수록 더 크고 또렷한 목소리를 향한 욕망은 커져간다. 나 대신 완벽하게 말해줄 누군가가 어딘가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다.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를 찾아 헤맨다. 그러는 사이 나에게도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만다. 목소리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김사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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