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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헌재의 소수의견

입력
2014.12.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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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중세 유학(儒學)인 성리학(性理學) 이외의 학문이나 사상은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그러나 유학(儒學) 자체가 당초에는 소수의견으로 출발했다. 논어에는 유학의 창시자 공자가 수모를 당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논어 ‘미자(微子)’에 나오는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이야기다. 천하를 주유하던 중 길을 잃은 공자가 자로에게 밭을 가는 장저와 걸닉에게 나루터를 묻게 했다. 장저는 길을 묻는 사람이 공자라는 말을 듣고 “공자라면 나루를 알고 있을 것이오”라면서 가르쳐주지 않았다. 자로는 걸닉에게 다시 나루터를 묻자 걸닉은 공자를 이렇게 조롱했다. “물이 넘치면 흘러가는 것처럼 천하가 다 그런데 누가 이것을 바꿀 수가 있겠는가? 또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 보다는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논어 ‘미자’) 자로가 돌아와서 장저와 걸닉의 반응을 전하자 공자는 크게 낙담해서 이렇게 답했다. “새, 짐승과 더불어 무리로 살 수 없으니 내가 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바꾸지 않으려 할 것이다.”(논어 ‘미자’) 이 사례에서 장저와 걸닉은 도가(道家)의 처세법을 뜻하고 공자는 유가(儒家)의 처세법을 뜻한다. 도가는 은둔의 처세법인 반면 유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나가 도를 실현하려는 출사(出仕)의 처세법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제후인 적이 없었던 공자를 제후들의 사적인 ‘공자세가(孔子世家)’로 분류했다. 사기에는 공자 일행이 정(鄭)나라에 갔을 때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한 정나라 사람이 자공에게 공자의 외양을 “상갓집 개 같다(若喪家之狗)”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후세의 공자는 신처럼 떠받들어졌지만 살아생전의 공자는 상갓집 개로 보일 정도로 초라했던 것이다. 게다가 유학은 진 시황 때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불리는 극심한 탄압까지 받았다. 한(漢)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국교의 지위까지 승격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유학은 당나라 때 한유(韓愈ㆍ768~824)가 ‘원도(原道)’라는 일종의 유학 부흥선언서를 작성해야 할 정도로 도교 및 불교의 성행으로 수세에 몰렸다. 유학은 북송(北宋) 때 이정(二程) 및 정자(程子)라고도 불렸던 북송의 정호(程顥ㆍ1032~1085)ㆍ정이(程?ㆍ1033~1107) 형제와 주자(朱子)로 불렸던 주희(朱熹ㆍ1130~1200)가 성리학(性理學)으로 집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도교 및 불교에 버금가는 다수 견해가 되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횡행하면서 주자, 즉 주희는 ‘만세의 도통(道統)’으로 떠받들어지면서 신성불가침이 되었고, 이에 반하는 학설들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탄압받게 되었다. 정여립(鄭汝立ㆍ1546~1589)이나 백호(白湖) 윤휴(尹?ㆍ1617~1680)가 제명대로 못 산 표면적 이유는 당쟁 때문이지만 그 뿌리에는 당시의 다수견해인 성리학과 달랐던 그들의 사상이 있었다. 정여립에 대해 서인인 안방준(安邦俊)은 ‘기축기사(己丑記事)’에서 “정여립이 유비(劉備)가 아니라 조조(曹操)를 정통으로 삼은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직필이며 유비를 정통으로 삼은 주자(朱子)가 틀렸다”고 말했다고 비난했다. 주희의 시각으로 삼국의 역사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비난이었다. 또한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定主)이 있겠는가”라고 천하의 주인이 국왕이란 사실을 부인했다고도 비난했다. 윤휴 또한 주희의 학설만을 정통으로 삼으려는 서인들에 맞서, “천하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다는 말이냐”라고 항변했다. 정여립은 서인들에 의해서 역모로 몰리자 자결했고, 윤휴는 서인들에 의해서 사형당하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통진당에 대해 헌재가 헌정 사상 최초로 정당해산 결정을 내리면서 논란이 거세다. 유권자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지역구 의원들의 자격까지 박탈할 수 있다는 조항이 헌법 몇 조에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지난 6ㆍ4 지방선거와 7ㆍ30 재보선에서 유권자의 외면을 받아 사실상 해체 수순을 걷고 있는 정당의 운명을 정부가 헌재로 가져가고 헌재가 이를 받아들이는 상황이 현재의 헌법 정신에 맞는지는 더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이 김이수 재판관의 소수의견에 눈길이 가게 한다. “피청구인(통합진보당)의 문제점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피청구인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오랜 세월 피땀 흘려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성과를 훼손하지 않기 위한 것이고, 또한 대한민국 헌정질서에 대한 의연한 신뢰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며, 헌법정신의 본질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 소수의견처럼 ‘우리가 오랜 세월 피땀 흘려 어렵게 성취한’ 민주헌법에 대한 해석권을 유사한 성장 배경을 지닌 특정 소수가 전담하는 현 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한 전 국민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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