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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배려의 시간

입력
2014.12.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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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송년모임에서 유행하는 ‘배려주(配慮酒)’라는 것이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동시에 서로의 입에 술을 먹여주는 것인데, 이 때 유의점은 자신이 술을 먹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술을 잘 넘기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가 잘 마실 수 있도록, 술잔은 입 중간에 대주고 목 넘김 상태와 속도에 맞춰서 술잔을 기울이는 등 술이 옆으로 새거나 급히 넘어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 방법을 얼마 전 부부 동반 모임에서 해보았다. 분위기가 어색하자 이 배려주라는 것을 시작했는데, 술을 못하는 사람은 음료수나 물을 이용해서 해보며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어느 부부는 아주 오래 동안 천천히 서로를 배려하며 잔을 비웠고, 어느 성격 급한 바깥 분은 잔을 급히 기울여 아내의 옷에 다 흘리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상대가 먹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먹여줄 생각은 없는 듯 잔을 기울이지 않자 스스로 키를 낮춰 먹기 위해 애쓰는 등 다양한 모습이었다.

배려란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재미있게도 배려주를 통해 알게 된 배려란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었다. 상대의 음용을 돕기 위해선 외형적으로 키를 비슷하게 맞추고 마주보는 노력이 필요했고, 내면적으로도 상대를 살피는 세심한 마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혼자가 아니라 동반자적 입장에서 함께 호흡을 맞춰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

찬바람이 매섭다. 어느 시기보다도 동행을 위한 배려와 나눔, 사랑이 절실해지는 시기다. 그런데 각박해지는 현실에서 따스하게 눈빛을 교환하며 정담을 나누기란 쉽지 않아진다. 그래도 우리 조상들은 지금같은 한 겨울에 감나무의 감을 한 두 개씩 까치밥으로 남겨두었고, 콩을 심을 때는 한 자리에 서너 개씩 심어 새나 땅속 벌레의 몫으로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배려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에 대한 세심한 배려의 마음까지 품었다.

그런 배려의 마음은 생활예술에도 잘 표현돼 있다. 예를 들어 분청사기 가운데 편병(扁甁)이라 하여 배 부분이 앞뒤로 납작하고 평평한 술병이 있다. 양면에는 아름답고 소박한 필선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어떤 편병은 주둥이 부분이 상면 중앙에 곧게 서있지 않고 한쪽방향으로 치우쳐 구부러져 있다. 말을 타고 이동할 때 주둥이가 가운데 위치하면, 움직일 때마다 튀어나온 주둥이가 말에 부딪혀 말이 아플 수도 있으니 말과 밀착될 한쪽은 평평하게 하고 주둥이를 반대편 쪽으로 치우치게 해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는 배려가 담겨있는 것이다.

배려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열차를 타기 위해 나섰다. 중앙선을 기다리는 서빙고 역사는 난방이 되는 실내가 아니라 찬바람이 쌩쌩 부는 실외 지상이다. 혹한의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열차를 기다리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약간의 바람막이가 되는 매표소에서 열차 도착 정보가 뜨는 전광판을 지켜보다 시간에 맞춰 탑승을 위해 내려가는데, 전광판 고장으로 안내가 잘못돼 열차 한 대를 놓쳤다.

중앙선의 배차 간격이 휴일에는 15분이 넘기 때문에 추위에 벌벌 떨며 다음 차를 기다린다는 게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열차를 놓치고 속상한 마음에 사무실 직원에게 전광판 오류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직원은 연신 죄송하다며 추운데 들어와 앉아서 기다리라고 사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곳에 앉아있는 동안 그래도 사람을 배려하는 훈훈함이 느껴져 열차를 놓쳤던 속상함도 풀어졌다.

배려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조선 선비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보여준 경주 최씨 집안처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고,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소작 수입 3,000석 가운데 1,000석을 내놓는 통 큰 배려가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배려주 잔을 기울이듯, 기쁜 마음으로 상대를 살피는 소소한 배려는 삶을 활기차게 하고 윤택하게 만든다. 추우니까 겨울이라지만 사람의 마음, 온정이야 냉랭한 겨울을 닮아선 안 될 것이다.

배려의 시간이다. 주변을 돌아보는 어질고 온화한 마음으로 한 해를 맑게 마무리 해야겠다.

안진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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