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부모님 선물로 강력 추천합니다”
김광석(1964~1996)의 네 번째 앨범 바이닐 음반(LP)을 파는 온라인 판매처의 광고가 눈에 띄었다. 엑소나 성시경의 음반을 사는 10, 20대 구매자를 유인하려는 속셈이었으리라. 그들도 ‘슈퍼스타K’나 ‘K팝 스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그의 노래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테니까.
음원 리마스터 과정을 거쳐 20년 만에 LP로 재발매된 이 음반은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꽤 괜찮은 선물일 듯하다. 3만원이 넘는 가격이 결코 싸다고 할 수 없지만 20년 전 나온 원본 LP가 현재 수십 만원에 거래되는 걸 감안하면 괜찮은 대안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LP를 사러 온라인서점에 접속했다가 깜짝 놀랐다. 발매도 안 됐는데 벌써 예약 마감에 품절이라니. 김광석의 음악을 다룬 뮤지컬이 쏟아져나올 때 웬 호들갑인가 했는데 일시적인 과열현상이 아니었던 거다.
김광석 4집 LP 품절 현상을 보면서 영화 대사 한 줄이 떠올랐다.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 박찬욱 감독의 출세작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북한군 오경필 중사로 출연한 송강호가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며 한 말이다. 남한의 이수혁(이병헌) 병장에게서 이 노래가 담긴 카세트 테이프를 선물 받은 그는 “오마니 생각”이 난다며 “야, 우리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잔만 하자우”라고 한다.
?맞다. 김광석은 술을 부르는 가수다. 비극으로 끝맺은 그의 삶은 몰라도 그의 노래만 들으면 술 생각이 난다. 먼지가 되어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매일 어딘가에서 취객들의 마음 속 풍경을 소묘하며 술 한잔을 권한다. 누군가는 서른 즈음에 이른 나이를 슬퍼하며 마실 테고 누군가는 언젠가 창가에 기대어 앉은 오후를 떠올릴 테고 또 누군가는 혼자 남은 밤을 외로워하며 마실 것이다.
매일 같이 알코올에 담가 놓아서일까. 김광석의 노래는 유행이라는 미생물의 공격에도 까딱하지 않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싱싱하기만 하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가수 중 김광석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신화화하고 향수의 강도가 커지는 인물이 또 있을까 싶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오랜만에 다시 보며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나 생각했다. 화면 속 송강호와 이병헌, 이영애는 무척 앳돼 보이는데 김광석의 목소리만 예나 지금이나 나이 들지 않고 그대로다.
영화 개봉 당시 박찬욱 감독은 그의 노래를 쓴 이유가 “남자답게 보이려고 애쓰면서도 마음이 여린 이수혁 병장의 이미지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라고 했다. 겉으론 강한 척하지만 실제론 여린 남자의 주제가.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쓴 장면은 특히나 인상적이다. 이 곡이 흘러나올 때 겉으론 강하지만 속은 여린 세 군인 송강호와 신하균, 이병헌이 함께 사진을 찍는다. 남과 북의 경계가 허물어진 비현실적인 현실. 세 사람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을 지우려고 남성식(김태우) 일병은 “아이, 좀 붙어봐요”라면서 줌을 당긴다. 하지만 살얼음판 같은 신뢰와 우정이 깨지는 순간 음악도 끊기고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도 박살이 난다.
김광석은 죽을 때까지 이등병이었다. 군 복무 중 세상을 떠난 형 때문에 병역 면제를 받아서다. 직접 가사를 쓰고 작곡한 건 아니지만 그는 부를 때마다 죽은 형을 생각했을 것이다. 전인권이 먼저 불러 알려졌던 이 노래는 김광석의 리메이크 앨범 ‘다시부르기’(1993)에 수록돼 있다. ?흥미로운 건 ‘이등병의 편지’가 영화에서처럼 공동경비구역을 넘어 북한에도 전파됐다는 점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북한에선 ‘떠나는 날의 맹세’라는 제목으로 군입대 전에 불린다고 한다. 가사는 달라도 ‘부모님께 큰절하고 / 대문 밖을 나설 때’ 느끼는 감정은 남이나 북이나 매 한가지인가 보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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