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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순천유람

입력
2014.12.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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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에서는 ‘익명성’을 보장받는 식당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도시의 규모가 작아서인지 모른다. 2인 이상 메뉴가 압도적으로 많은걸 보면 어울려 먹는 문화가 만연해서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님 내 마빡에 ‘외지인’이란 딱지라도 붙어있단 것인지, 부득이 홀로 식사를 할 경우 공격적인 호구조사로 탈탈 털리곤 한다. 이를 받아내는 맷집도 진화하기 마련이어서 한번은 재미 삼아 ‘광양제철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온 신혼3년 차 충청도 출신의 여성’이라 능청스레 연기한 적도 있다. 주인 아주머니는 아이를 갖는 몇 가지 노하우를 전수해주셨다. 하마터면 아구창 속 밥풀을 난사할 뻔 했지만, 아주머니의 비급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담 번엔 난이도를 높여 경상도 여인을 연기해 볼 생각이다.

오늘은 마침 순천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웃장’에 들러 이리저리 배회하는데 마침 ‘유명한 만두집’을 찾고 있는 여행객을 발견했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들키지 않도록 멀찍이 간격을 유지해 슬금슬금 그들을 미행했다. 식당에 들어선 순간,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홀은 넓고 부산하다. 홀로 찾은 손님도 띄엄띄엄 산재해있다. 이 집이라면, 군중 속 고독을 방해 받지 않으며, 섣부른 연기력을 모험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식사를 주문해놓고 뒤늦게 검색해보니 다행스럽게도 순천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손만두집이다. 떡만두국이 4000원일 정도로 착한 가격에 소탈한 분위기이지만, 주방은 훤히 공개되어 깨끗하다. 만두를 빚으며 뼈가 굳었을 여인들의 일사분란한 손길엔 노련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드디어 떡만두국이 도착했다. 속이 꽉 찬 고기만두와 김치만두가 다섯 개나 들어있다. 그보다 더 놀란 것은 기존의 해물 칼국수를 압도할 분량이라 할 신선한 바지락과 굴의 조화로운 투하였다. 만두 속만 꽉 찬 것이 아니라 바다 생물로 가득 찬 국물도 묵직했다. 건더기 몇 개 건져지지 않는 한양의 무성의한 떡만두국들이 오버랩 되었다.

연이어 빵집을 찾아 나섰다. 순천에는 1928년에 개점해 84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 있다. 이 빵집은 생존을 위한 변화보다는 전통을 지키는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듯하다. 쇠락해 보이는 빛 바랜 인테리어에 진열대 위 올려놓은 빵 종류도 단출히 3종류 뿐이다. 백설기 카스테라, 보통 카스테라, 찹쌀떡. 전국적으로 택배주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찹쌀떡이 유명하다지만, 백설기 카스테라를 골랐다. 빵집을 나와 신호등을 건너면 독립투사 박항래의 멋진 흉상이 보인다. 기미년, 순천의 남문 연자루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하다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고 만 독립운동가라고 추모비는 기리고 있다. 잠시 묵념. 그리곤 벤치에 앉아 박항래 아저씨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화월당의 카스테라를 우유와 함께 먹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 달짝지근한 호사도 없다 싶다.

잠깐의 허기를 달랜 후, 이번엔 본격적으로 시장 구경에 나서본다. 늘 시장의 따뜻한 정감이나 날것 같은 에너지를 편애해 왔었다. 시장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도 뇌 속의 시름도 깡그리 잊을 수 있는 덕택이다. 순천에는 그 이름도 정겨운 ‘웃장’ ‘아랫장’이 세 정거장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구례, 곡성, 광양, 벌교, 장흥 등 주변의 들과 밭, 혹은 바다로부터 수확한 농수산물이 노변에서 즐비하게 반긴다. 할머니들이 앉아계신 작디작은 노점상엔 직접 농사지었을 것이 분명한 고추, 호박, 생강, 깻잎 등이 단출히 그러나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할머님들의 손과 입은 한시도 쉬질 않는다. 거친 손으로는 야채를 다듬으면서 구성진 목소리로는 쉴새 없이 마을의 애송사를 옆에서 옆으로 전한다. 웃장에서 가장 맛있다는 국밥집에 들어갔다. 주제 파악 잠시 잊고 용맹스레 국밥 한 그릇을 시켰지만, 여전히 내 촌스러운 비위는 '몬도가네'의 야생성을 버거워한다. 돼지머리와 내장의 난장 속에서 부추와 밥만 조심스레 건져먹고 일어섰다. 주인 아줌마께서 “왜 일케 못 먹냐” 서운해 한다. 화월당 빵 봉다리를 들어 보이며 다음 번엔 빈속으로 찾아와 더 맛있게 먹겠다 약속했다. 이방인 대하듯 겉돌아도 이 고장이 자꾸만 좋아진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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