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농산물 국가수매제 실행하라! 그럼 나도 비키니 댄스 추겠소

입력
2014.12.19 18:02
0 0

마지막 꾸러미 택배 보내고 나니 올 농사 마무리 기분 들어 홀로 한 잔

밤 9시... 밖은 눈발만 나부끼고 서울에서 한참 달릴 시간인데 동네는 캄캄하고 술친구 찾기가...

동네 형님이 초짜 농부인 필자(왼쪽)에게 관리기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다. 얼핏 쉬워 보이지만 힘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 홀로 농사를 짓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보면 된다.
동네 형님이 초짜 농부인 필자(왼쪽)에게 관리기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다. 얼핏 쉬워 보이지만 힘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 홀로 농사를 짓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보면 된다.

술 한 잔 했다. 밤 9시, 혼자 한 잔 하는 중이다. 낮에, 눈 오는데 뭐 하냐며 막걸리나 한 사발 하자는 친구 전화를 꾸러미 포장하느라 바쁘다고 끊어버린 뒤부터 술이 땡겼나 보다. 택배비 10여 만 원 내고 나니 지갑은 비었고, ‘돈을 벌러 다니는 건지 쓰러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혼잣말에 우체국 직원은 “아이고 원사장님, 그래도 보낼게 있으니 다행 아닌가요” 한다. 수염도 못 깎은 꼴을 위로라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또 나보고 사장님이란다. 이 곳에선 ‘사장님’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뭐라고 불러야 할 지 애매한 모양이다. 형님이라 부르자니 동생 소리 듣긴 싫고, 선생님이라 하자니 그닥 배운 것 같진 않고, 그냥 누구씨 했다간 한 대 맞을 것 같으니 흔히들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래 뭐 어떤가. 출퇴근 시간 따로 없고 쉬는 날 내 맘대로에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사람 없으니 사장님이랑 비슷하지 뭐. 월급 줄 직원도 따로 없어 더 좋고.

밖은 눈발이 계속이고 조금 더 마시면 좋겠는데 하얗던 동네는 이미 캄캄해졌다. 서울에서야 한참 더 달려도 괜찮을 시간이지만 여기선 술친구 찾아 전화해봐야 욕만 들입다 먹을 시간이다. 혼자 먹는 술은 맛이 별로 없다. 허나 어쩌랴. 아내는 선천적으로 술을 못하고 아들 녀석 선재는 아직 중학생이다. 후회스럽다. ‘선재를 조금 일찍 낳았어야 하는건데...주도(酒道)라도 선행학습을 시켜?’

꾸러미 회원들에게 배송할 물품들. 돔부 콩과 간장류, 그리고 매달 도정한 쌀을 함께 보낸다. 회원들의 든든한 응원 덕에 한 해를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다.
꾸러미 회원들에게 배송할 물품들. 돔부 콩과 간장류, 그리고 매달 도정한 쌀을 함께 보낸다. 회원들의 든든한 응원 덕에 한 해를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다.

메주도 쑤어 매달아야 하고 볏짚 묶어 정리도 해야 하고, 이런 저런 일이 남았지만 올 해 마지막 꾸러미를 만들어 이곳 저곳 보내고 나니 1년 농사 마무리한 기분이다. 더워 죽겠다고, 풀 땜에 못살겠다고 궁시렁거린 게 얼마 전인데 이제 아궁이에 불 때면서도 춥다고 또 주절댄다. 그렇게 당연스레 또 반복하는 것일까. 야심차게 “삼세번!”을 외치며 시작한 올해 농사, 그저 또 다른 반복중의 한 번이 되는 건가. 목구멍을 타고 드는 소주 맛이 쓰다. 올리고당도 넣었다는데.

며칠 전 월요일, 나락 포대 8개를 싣고 정미소에 갔다. 다음날부터 눈이 쏟아진다는 소식에 바람 덜 불고 맑은 날 방아 찧겠다고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바로 앞 차례 어르신 순서가 돼 경운기에서 포대 내리는 걸 돕다 보니 우리와 이웃한 논을 짓는 어르신이다. 반가워 짧게 인사 드리고 일단 나락을 정미기 구멍에 쏟아 붓는데 기계가 떡 멈춰버렸다. 설마 했지만 불길한 마음이 적중했다. 정미소 주인이 고장난 모터와 장시간 씨름을 했지만 남원에서 기술자를 불러야 했고 도정은 다음날이나 된단다. 하필이면 내 앞 차례에서. 하긴 나락 넣는 중에 기계가 서버린 분도 있긴 하지만.

수요일에 꾸러미를 보내기로 했으니 화요일까진 도정을 마쳐야 했다. 스키장 제설기가 내뿜는듯한 눈보라를 뚫고 정미소에 도착하니 어제 그 어르신과 나 뿐이었다. ‘혹시’하는 생각을 애써 접고 ‘날씨는 안 좋아도 사람 없어 좋다’ 생각으로 기다리는데 잘 돌던 기계가 또다시 멈췄다. 이번엔 옆 라인 모터가 돌아가셨단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 전날에 이어 두 번 째 넣다 걸린 어르신 앞에서 앓는 소리 하기도 미안했다. 별 수 없다. 호흡 가라앉히고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논 말고도 농사가 많은가?” 난로도 없는 대기실에서 어르신이 물었다. 무료하실 것 같아 주저리주저리 길게 말씀을 드렸다. 나름 밝은 목소리로 말씀 드렸는데 아저씨는 다시 물으셨다. “그러게 뭐하러 내려오셨는가. 힘들지 뻔히 알면서.” 대기실 공기는 급속도로 춥고 무거워졌다. “그러게요”라는 대답도 못 드렸다. “이제는 지을 농사가 없어. 모르겠네. 내년 봄엔 또 뭘 심어야 될지...” 대꾸해드리기도 겸연쩍어 뒹굴던 신문을 집어 들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잡곡이 잘 팔려 국내산 콩 값이 작년 절반이라는 얘기, 감자 저장량이 많아 내년 봄 출하될 햇감자도 똥값일거라는 예상, 양파는 아예 안 심어도 내년에 먹고 남을 만큼 쌓여있다는 기사들이 이어졌다. 접어버렸다. 어르신이 내다보는 창 밖에는 눈이 횡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허어, 살벌하구만.” 날씨만 말씀하신 게 아닌 것 같다.

지난 달 중순, 껍질을 깎은 대봉과 떫은 감을 농막 처마 밑에 걸어 놓았다. 약간의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한 달 여가 지나니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단맛이 강한 곶감이 되었다.
지난 달 중순, 껍질을 깎은 대봉과 떫은 감을 농막 처마 밑에 걸어 놓았다. 약간의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한 달 여가 지나니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단맛이 강한 곶감이 되었다.

어렵사리 도정을 마치고 곶감을 가지러 농장에 갔는데 장씨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 따라 들어오셨다. “뭐이 바쁜척험서 돌아댕기는가. 커피나 한 잔 주게.” 아무리 바쁠 때 오셔도 반가운 분이다. “방아 찧고 왔어요.” 커피를 급하게 타서 드리는데 아저씨가 자랑하신다. “금년 우리 나락도 거의 친환경이여. 거의 안쳤어.” 농약을 다른 해보다 적게 뿌렸다는 말씀이다. “내년에도 조금 줄여보시면 되겠네요. 그러다가 진짜 친환경 하시는 거죠 뭐.” 했더니 아저씨 안색이 바뀐다. “이봐, 내가 왜 친환경을 안허는지 아는가?” 역습이다.

“팔 데가 없어. 지어봤자 팔아 묵을데가 없다고. 알겄는가? “아저씨, 화 나셨어요?” “자네헌테 화 난거시 아니라, 그냥 부홰가 나. “왜요?”

아저씨 말씀은 이랬다. 얼마 전에 남원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대형마트 친환경 농산물 코너가 있어서 둘러보셨단다. 두 번 놀라셨다고 한다. 생각보다 가격이 비싼데 놀라고, 친환경 농산물인데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더라고 하셨다. 50년 농사 전문가가 봐도 농약을 안 하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물건들이었고 하신다. 서울에서 내려와 친환경으로 농사짓겠다고 설치는 어떤 놈이 우습기도 했지만 응원하는 마음이 더 컸고, 늦게나마 ‘나도 한번?’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거기서 좌절감을 맛 보셨던 거다.

“이봐, 내가 아무리 물건을 좋게 만들어봤자 그런 큰 가게에 뚫고 들어갈 재간이 없네. 중개업자한테 넘기면 그만큼 받기도 힘들고. 어쩔 수 없잖은가.” 뭐라고 말씀드릴 게 없었다. “그라고 말이여, 도시 사람들이 그렇게 이쁘고 깨꼬롬한 것만 찾는디 나는 약 안치고는 그렇게 만들 재간이 없어. 좋고 나쁜 건 벌거지가 더 잘아는 벱이거든. 거기 있던 물건들이 알게 모르게 약 친거라고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나는 그렇게 만들 재주가 자네만큼도 없단 말이시. 농약을 치는게 사람 아플 때 약 먹는 것허고 똑같이 생각해 왔는디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뀌겄는가.” 속상한 마음을 감출 생각이 없으신가 보다.

“자네는 계속 혀 봐. 내가 봉께 그렇게 하면 되겄어. 자네는 인터넷으루두 곧잘 팔아 묵지 않는가. 힘들어도 허는 놈은 해야 되는 거고, 글다 보면 도싯놈들도 알아 주겄지.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어떻게 해 보겄는디, 이젠 안 되야.” 아저씨 말씀이 짠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다른 어르신들이 “그렇게는 안 돼” 할 때도 아저씨는 “함 해보소. 잘 안 되면 내꺼 나눠줄게. 일단 함 해봐”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 덕에 이나마 해 왔는데, 아저씨마저 기운 빠진 모습을 보이니 내 기운도 따라 빠지는 게 당연했다.

인근 과수원 나무에 매달아 놓은 감이 까치밥 치고는 좀 많은 편이다. 감 시세가 괜찮았던 작년 같으면 사람을 사서 남김 없이 땄을텐데 올해는 누구를 주고 싶어도 품삯을 뽑지 못해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인근 과수원 나무에 매달아 놓은 감이 까치밥 치고는 좀 많은 편이다. 감 시세가 괜찮았던 작년 같으면 사람을 사서 남김 없이 땄을텐데 올해는 누구를 주고 싶어도 품삯을 뽑지 못해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잠시 소줏잔 내려 놓고 금년 장부를 들춰봤다. 가계부와 농사일지를 보니 그래도 작년보다는 잘 해냈다. 농사 수입도 조금 더 커졌고, 아르바이트 수입도 늘어서 마무리만 잘 하면 적자 폭은 줄일 수 있게 됐다. ‘적게 먹고 가늘게 싸자’는 기치를 들고 내려와서 비록 먹는 걸 줄이는 건 실패했지만 그나마 근근이 남한테 손 안 벌리고 살고 있다. ‘적게 먹고’를 실현한다면 흑자 원년도 당길 수 있을 것 같다.

춥고 습했던 집에서 깨끗한 집으로 이사도 했다. 그 덕에 몸이 좋지 않던 아내도 건강이 나아지는 듯 하다. 그렇게 기운이 생겨난 후유증인지 다툼도 늘었지만 그저 건강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아내가 이집 저집에서 가져온 김장 김치 때문에 올해도 직접 담그는 김장을 걸러야 하는 게 아쉽긴 하다.

초등학교 때 이 곳에 내려온 아들도 내년이면 고등학생이 된다. 내려와서는 하고 싶다는 것도 많았고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많았다지만, 무엇보다 자기가 잘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힘들어하지 않고 스스로를 잘 위로하는 것 같아 대견하다. 대견한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조금은 괴로워해도 괜찮다고 말해줄까 생각 중이다.

다 좋은데 내년 농사가 걱정이다. 나야 작물을 좌판에 내놓는 것도 아니고, 뒷심 든든한 회원들 덕분에 소신껏 운영할 수 있지만 시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상황을 봐가며 회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종목과 물량을 정해야 하는데, 사실 지금은 어떤 석학이나 농사 베테랑도 예상 적중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생각 같아서는 농촌 초유의 안식년 제도를 도입해서 적용해볼까도 싶고, 날씨와 상관없이 주5일제 근무를 시행해볼까 싶기도 하다. 겨우 3년 농사짓고 지친 거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맞다. 조금 지쳤나보다. 물론 등 따신 봄이 돌아오면 또 몸이 근질거리고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도 새순 따라 올라 올거다. 그 막연함이 또 문제가 될 것이고.

TV를 켜니 맨날 똑 같은 순서로 기자가 얘기한다. 그림자가 더 짙을 것 같은 사람들, 땅콩을 닮은 사람들, 찌라시와 검은 봉다리. 이젠 좀 지겹다. 마루에 나와서 컴퓨터를 켜니 인터넷 기사 하나가 시선을 잡아 끈다. 섹시 컨셉의 여가수가 “쌍용차 해고자 문제가 해결되면 비키니 입고 춤 추겠다”는 내용이다. 해고자 문제를 비키니 춤으로 언급하는 게 맞나 싶었다가, 소주 한 잔 더 마시고 두 가지를 별개 사안으로 생각하니 둘 다 이뤄지면 참 좋겠다 싶었다.

그으래? 그럼 나도 제안 하나 해 볼란다.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가 실행되면 나 또한 비키니 입고 춤을 추겠소! 원한다면 토플리스까지 가능하오!”

아, 쪼끔 취했나 보다. 정신 차리면 잘 생각해보고 다시 얘기해야겠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