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생쥐스트는 프랑스 혁명 절정기(1792~94년)에 로베스피에르, 당통과 함께 공포정치의 3인방을 이룬 인물이다. 당통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장본인으로 알려졌다. 청소년기에 플라톤과 몽테스키외, 루소의 책을 탐독하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 가운데 특히 자유에 집착했다. 그에게 자유의 포기는 인간 자격과 본연의 권리,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혹독한 탄압과 몰수, 처형으로 ‘죽음의 천사장’으로 불린 한편 ‘자유의 수호자’로도 불렸다.
▦ 그는 반대파 탄압의 논리로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가 없다”고 외쳤다. 또한 “인민의 자유 남용은 인민의 노예상태를 부른다”고 강한 경계심을 표했다. 그의 예언은 40여년 뒤 이웃나라 독일에서 현실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가까웠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은 적어도 형식적 민주주의의 요건은 채웠던, 나치의 집권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짓밟는 독재와 전쟁, 대량 학살이었다. 쓰라린 역사 경험에 대한 성찰의 결과가 바로 ‘방어적 민주주의’ 또는 ‘투쟁적 민주주의’다.
▦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유린하려는 ‘민주주의의 적’의 공격에 대해서는 체제 수호를 위한 방어적 투쟁에 나설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 또는 그런 원리를 구현한 헌법체계를 뜻한다. 생쥐스트가 설파했듯 ‘자유의 적’에 대해서는 자유를 줄 수 없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런 각성의 결과 독일은 헌법에 직접 기본권 상실제도와 위헌결사(違憲結社) 금지를 규정했다. 표현(언론ㆍ학문ㆍ집회ㆍ결사ㆍ통신 등)의 자유 남용이 주된 규율 대상이 되어왔다. 무제한적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미국과는 사뭇 다르다.
▦ 우리 헌법은 독일처럼 모든 위헌결사를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정당에 대해서는 엄격한 자유의 한계를 명시했다. 헌법 8조 4항의 위헌정당해산심판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헌법 37조 2항에 따른 일반적 기본권 제한도 정당활동에 당연히 적용된다. 어떤 헌법적 가치도 다른 헌법적 가치를 억누를 수 없다는 가치상대주의에 빠지지만 않으면 쉬이 공감할 만한 장치다. 다만 자유와 자유의 적을 가리는 과정에서 주관의 개입을 완전히 차단하기 어렵다는 점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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