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규 지음
문학동네ㆍ544쪽ㆍ2만8,000원
우리가 우울감 표현하던 그 단어
실은 서양문화의 핵심적 정체성
지독한 자의식이 민주사회 형성
멜랑콜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온전하게 담아내는 한국어는 없다. 차라리 그림으로 소통하는 게 훨씬 빠르고 정확할 터인데, 모든 예술가와 창작자들의 미간 깊이 박힌 비애를 떠올린다면 그나마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우울, 신경증, 광기, 어두움, 슬픔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멜랑콜리라는 단어를, 철학자 김동규는 저서 ‘멜랑콜리아’에서 서양철학, 나아가 서양문화의 한 정체성으로 규정했다.
일상에서 한갓 기분을 표현할 때 사용되곤 하는 멜랑콜리를 서양문화의 핵심으로 지목하는 저자의 주장은 언뜻 지나쳐 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지성들이 멜랑콜리를 규명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헛발질의 역사를 보면 그 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피상적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예술 방면의 비범한 사람들이 모두 멜랑콜리커였다고 증언하며, 그들의 몸 속에 검은 담즙이 흐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불 같은 혈액도, 맑은 체액도 아닌 검은 액체가 몸 안에 흐를 거란 추측, 그것이 우울의 원인일 것이란 주장은 과학보다는 시에 가깝다. 그러나 이는 창조적인 사람들이 뿜어내는 어두움의 정조가 서양에서 얼마나 익숙한 그림이며, 또 고대부터 얼마나 많은 사상가들이 ‘어둠과 창조’의 연결고리에 관심을 가졌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다.
저자는 서양의 멜랑콜리에 대한 동양의 이해 부족을 지적하는 데 힘을 쏟지 않는다. 그가 진짜로 하려는 것은 멜랑콜리를 ‘서양의 것’으로 상대화하는 일이다. 저자는 니체, 하이데거 등이 창조의 필연적 원천인 것처럼 여겼던 멜랑콜리의 절대성을 부인하며, 그것은 그저 서양인들의 ‘문화적 기질’이라고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가 오래 잊고 있던, 고통에 대한 다른 지역의 대처 방식ㆍ한이나 열반도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책은 나아가 멜랑콜리를 통해 서양철학의 정체성을 파악하려고 덤벼든다. 프로이트는 멜랑콜리가 소수에게서만 보이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며, 그것을 사랑의 상실에 대처하는 어린아이 같은 태도, 즉 유아기의 자기애적 동일화로 퇴행하면서 겪게 되는 질병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 말을 받아 멜랑콜리의 핵심인 ‘자기 개념’과 서양사 전반에 드러난 지독한 자의식을 나란히 놓는다. “자기정체성을 극대화하는 논리, 자기정당화의 논리, 동일성을 보존하고 모순을 배제하는 논리는 폐쇄적이다.(…) 그런데 그런 개체들이 모여 투쟁하다 보면, 자기와 동등한 개체로서 타자를 인정하게 되고, 결국 어지간한 논쟁이나 분규는 용인하는 개방사회, 즉 민주주의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저자는 서양의 강력한 자기 개념과 민주주의의 태동을 연결시키면서 우리가 당연히 믿고 숭상해온 것들의 가치를 전복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 서구로부터 폐쇄적이라 지탄 받는 중국에 대한 평가는 바뀌어야 할 듯 하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일정한 수준에서 타인과 화해를 꾀하는 동양(중국)의 개방적인 논리는 도리어 상대에게 이미 충분히 관용을 베푼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투쟁도 용인하지 못하는 폐쇄사회의 모습을 보인다.”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정신 중 무엇이 우월한가의 논쟁이 재점화하기 직전, 저자는 미래로 논의의 방향을 튼다. 서양의 정신을 상대화한 것은 비하의 목적이 아닌, 서양철학을 무작정 추종하는 것도 동양의 옛 철학을 끄집어내는 것도 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제3의 철학을 말하기 위한 기초작업임을 분명히 한다.
제3의 철학, 미래의 정신, 동서가 모두 거주할 수 있는 ‘감각의 공동체’의 실마리를 저자는 우리 시인들의 시에서 찾는다. 김수영, 기형도, 이성복, 진은영 등 유달리 철학적 색채를 강하게 뿜어내는 한국 시인들이 멜랑콜리를 수용하고 변용하는 과정에서 동서 철학의 긍정적인 화학작용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는 이성복의 최근 시 ‘연에 대하여’에서 한도, 멜랑콜리도 아닌 ‘애(哀)’의 정서를 읽어내며 희망을 품는다.
“마침내 실감개의 실이 다 풀리고 까마득한 하늘 높이 까박까박 조는 연에서 흘러내린 실은 제 무게 이기지 못해 무너지듯 휘어지지요. 그 한심하고 가슴 미어지는 연은 그러나, 참 한심하고 가슴 미어진다는 기색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만 흘러내리고, 그때부터 울렁거리는 가슴엔 지워지지 않는 기울기 하나 남게 되지요.”
시를 관장하는 정서를 저자는 서러운 슬픔으로 파악했다. “이전 이성복의 시에서 보였던 멜랑콜리가 급격한 상승과 추락을 반복하는 수직의 기울기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이번 시에서 느껴지는 서러운 슬픔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세상과 타협해서 얻은 원만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슬픔이 끌어당기는 중력 때문에 비상의 꿈이 조금씩 무너져 내린 ‘긴장된 시간들의 긴 궤적’을 뜻한다.”
긴장된 시간들의 긴 궤적, 여기서 우리는 고통을 대면하는 ‘더 좋은’ 문화적 기질을 발굴할 수 있을까. 서양철학이 유통기한을 다 하고 동양철학의 부활이 요원한 현 시점에서 저자가 시작한 관념의 여정에 응원을 보내게 된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