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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조치, 쿠바 미사일 위기 등으로 50년간 앙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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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조치, 쿠바 미사일 위기 등으로 50년간 앙숙

입력
2014.12.1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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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쿠바의 갈등은 1959년 1월1일 쿠바혁명으로 싹텄다. 혁명 초기 양국 사이에는 온기가 흘렀다.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대통령을 축출한 피델 카스트로가 권좌에 앉자마자 미국은 새 정권을 승인했다.

냉기는 곧 형성됐다. 카스트로가 59년 경제 지원 요청을 위해 방미했으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카스트로를 공산주의자라며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 카스트로는 당시 토지분배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자라가 아니다”고 주장하곤 했다. 미국이 적대감을 드러낼 때 옛 소련은 쿠바에 사탕수수 50만톤을 사들이는 대신 1억달러의 차관 제공을 약속했다.

60년 카스트로가 공언과 달리 미국 회사 소유 정유 시설을 국유화화면서 갈등의 골이 확연히 드러났다. 미국은 60년 10월 쿠바 금수조치를 선언한 뒤 61년 1월 쿠바와의 단교를 단행했다. 세 달 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자들로 구성된 반군이 피그만 침공에 나섰다가 카스트로에 의해 격퇴됐다. 다음날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국가 출범을 선언했다.

62년 9월 일명 ‘쿠바 미사일 사태’로 양국 갈등은 정점에 올랐다. 쿠바가 소련으로부터 핵미사일을 반입하려 하자 미국이 해상 봉쇄에 나섰다. 양국의 대치에 소련이 끼어들면서 인류는 핵전쟁 문턱까지 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개인적으로 약속하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77년 지미 카터 정부가 들어선 뒤 국교 정상화가 시도됐으나 쿠바군의 아프리카 군사활동, 80년 쿠바 난민의 미국 유입으로 갈등이 재발했다. 96년 쿠바 공군이 쿠바 난민 구조에 나선 미국 민간 항공기 두 대를 격추, 4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98년 미국이 간첩 혐의로 쿠바인 5명을 체포하고 2009년 쿠바는 미국인 구호활동가 앨런 그로스를 국가전복혐의로 기소하는 등 갈등은 지속됐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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