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월 최초 보고받고 묵살, 외부 유출 알고도 사건 덮기만
朴 대통령은 '찌라시' 일축 '7인 모임' 배후설도 불신 키워
박근혜 대통령 주변 권력 암투 의혹의 불씨가 된 ‘정윤회 문건’을 박관천 경정이 작성한 것은 올 1월 6일이었다. 열 달이 지난 11월 28일 세계일보가 이 문건을 보도하면서 불씨는 초대형 폭탄이 돼 터졌고, 그 여파는 3주 가까이 청와대를 뒤흔들고 있다.
문제는 청와대가 1월 이미 문건의 존재와 내용을 파악했고, 4~6월엔 민감한 문건들이 유출된 사실을 파악하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청와대가 의혹의 불씨를 조기에 규명하지 않은 채 묵살하다 스스로 폭탄으로 키운 것이다. 더구나 박 대통령이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문건은 찌라시”라고 성급하게 단정하고 청와대 일부에서 ‘7인 모임’ 배후 의혹설을 제기하는 자충수를 두면서 여론의 불신을 증폭시켰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폭탄 돼 돌아온 문건 묵살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정윤회씨가 이른바 ‘청와대 십상시’와 밀착해 국정을 농단한다는 동향 정보가 담긴 문건의 내용을 1월 보고 받았다. 하지만 김 실장은 별다른 조치 없이 사실상 묵살했다. “허무맹랑한 얘기에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다. 실제 검찰 수사에서 해당 문건은 박 경정이 미확인 항설들을 취합한 수준인 것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그러나 문건에 담긴 내용 자체가 극도로 민감한 사안이란 점에서 당시 청와대의 단순 묵살은 결과적으로 두고 두고 불신을 낳은 치명적 패착이었다. 청와대 주변에선 당시 최소한의 사실 확인 등을 거쳐 해당 문건의 사후 조치 보고서를 남겼다면 혼란이 커지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가 적지 않다.
문건 유출 국면에서도 청와대의 대응은 부실투성이었다. 정호성 1부속비서관은 외부로 유출된 128쪽짜리 청와대 문건 사본을 오창유 전 행정관으로부터 6월 초쯤 전달 받았다. 청와대 문건 대량 유출이라는 초유의 사태였다. 문건 내용도 박지만 EG회장과 부인 서향희씨 등에 대한 민감한 것이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대대적 조사를 통해 유출 주체와 경위 등을 밝히는 대신 조용히 사건을 덮었다. 청와대는 “오 전 행정관이 문건 출처를 밝히지 않아 방법이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이 역시 의혹의 불씨를 살려둔 실책이었다.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민감한 사안을 담은 문건이 내부에서 생산된 데 이어 외부로 유출까지 됐는데도 안이한 대응이 이어진 것이다. 이는 김기춘 비서실장 책임론이 제기되는 지점이다.
의혹과 불신 키운 위기 대응
청와대는 세계일보 보도 직후 언론사를 검찰에 고소하는 강수를 뒀다. 검찰 수사를 통해 의혹을 해소하겠다는 뜻이었지만, 수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짜맞추기 수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박 대통령이 "문건은 터무니 없는 찌라시"라고 일축하고 청와대 비서관 3인방을 두둔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등 다소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도 검찰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논란을 자초한 결정적 실책으로 꼽힌다. 박 대통령이 강경하게 나오다 보니 인적 쇄신과 청와대 인사시스템 개혁 등 이번 사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이 논의될 공간이 없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는 사태 초기부터 사실상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을 문건 작성과 유출의 배후로 지목해 주변을 압박했다. 일부 청와대 관계자들 사이에선 조 전 비서관을 중심으로 한 '7인 모임'이 문건 유출을 주도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검찰이 7인 모임은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는 등 실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공세는 무위로 돌아가고 청와대의 도덕성도 상처를 입게 됐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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