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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끝에서 시작된 나눔, 상처투성이 나를 살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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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끝에서 시작된 나눔, 상처투성이 나를 살렸죠

입력
2014.12.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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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마비·우울증 이기려 꺼내든 붓...하루 200~400장씩 7년째 이어가

이홍근씨가 10일 서울 종로구의 작업실에서 글씨를 완성한 뒤 낙관을 찍고 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마음”을 부탁했더니 “정말 어렵다”며 한참을 주저하다 ‘中庸(중용)’이란 두 글자를 썼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세 번이나 다시 썼다. 이씨는 “아마 가장 어려운 게 중용과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이어서 쓰기도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이홍근씨가 10일 서울 종로구의 작업실에서 글씨를 완성한 뒤 낙관을 찍고 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마음”을 부탁했더니 “정말 어렵다”며 한참을 주저하다 ‘中庸(중용)’이란 두 글자를 썼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세 번이나 다시 썼다. 이씨는 “아마 가장 어려운 게 중용과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이어서 쓰기도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휴일인 지난 7일 오후 서울 인사동의 북인사 마당. 장애 서예가인 ‘민들레’ 이홍근(64)씨가 행인들의 성별, 나이, 좌우명, 심리상태 등을 물은 뒤 그에 알맞은 한자를 일필휘지로 써 무료로 나눠주고 있었다. 주변에는 30여명의 관광객들이 빼곡히 둘러섰다.

데이트 중인 남녀가 글씨를 부탁하자 ‘如寶當身(여보당신)’이라고 썼다. “마땅히 함께 해야 할 보배와 같은 존재니 서로 아껴주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고교생에게는 “원대한 꿈을 가슴에 품으라는 뜻에서 ‘夢(꿈 몽)’자를 써 주겠다”면서 저녁 석(夕)대신 새벽 신(晨)을 받침으로 넣은 새로운 글자를 써서 건넸다. 저녁이 아닌 새벽에 꾸는 새로운 꿈을 꾸라는 의미다.

이씨는 2007년부터 이곳에서 관광객과 내국인들을 상대로 무료로 붓글씨 작품을 나눠주고 있다. 그의 글씨를 우연히 접한 일반인들의 블로그에도 여러 차례 오르내리는 등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사동의 유명인사다. 매주 주말과 휴일이면 오후 1시부터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글씨를 쓰는데 붓글씨에 익숙한 중국인들은 물론 벽안의 서양인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이씨는 “하루에 200~400장씩 나눠 줬으니까 내 글씨를 받아간 사람이 전 세계적으로 수 만 명은 될 것”이라고 했다. 필요한 지필묵은 관광객이 가끔 건네는 작은 성의로 충당한다.

청봉(靑峰)이라는 호가 있지만 낙관에는 ‘민들레’라는 애칭을 더 자주 사용한다. 독학으로 붓글씨를 터득해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었는데, ‘민들레체’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민들레는 강한 생명력을 갖고 널리 퍼져 나가는 습성이 있다”며 “내 글씨에도 생명력이 살아 숨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붓글씨를 쓸 때는 남 부럽지 않지만 지금도 종로의 월세 20만원짜리 쪽방에서 홀로 생활할 정도로 삶은 순탄치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로 오른 다리를 쓸 수 없었던 이씨는 이혼 후 1999년 어머니의 실수로 얼굴에 화상까지 입으면서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또 무남독녀 외동딸이 가출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완전히 외톨이가 됐다. 2001년 이런 심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평소 자신 있던 붓을 들면서 서예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씨는 자신의 실력을 알아본 한 단체의 후원으로 2010년, 2011년 작은 전시회도 열었다.

전남 해남 버스터미널 앞에서 붓글씨를 써 무료로 나눠주면서 겨우 자리를 잡는가 싶었는데 그나마 쫓겨난 뒤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곳이 인사동이다. 지금은 쪽방이라도 있지만 막 상경했을 때는 서울역 등을 전전하며 노숙생활을 했다. 어렵게 모은 10만원을 잠자는 사이 도둑 맞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상처가 많은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재능을 나누며 뭔가 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가끔 운이 좋아 전시회까지 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글ㆍ사진 강주형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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