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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색채 없는 담백한 수필이 왜 금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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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색채 없는 담백한 수필이 왜 금서였을까

입력
2014.12.1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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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만난 것은 ‘문장강화’를 통해서였다. 아마 대학 시절 언론사 취업시험 준비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보다 글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소박한 염원을 갖고 우연히 조우한 것 같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문장강화’는 문장론의 고전적 교본인데도 작가 이태준이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금서로 묶였던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다.

‘무서록’도 같은 이유로 금서 목록에 포함돼 있다가 1990년대 초반 해제됐다. ‘무서록’을 만난 것은 금서에서 해제된 그 즈음이었다. ‘문장강화’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무서록’ 또한 ‘왜 금서목록에 포함됐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념적 색채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무서록’은 9인회 멤버로 활동했던 상허 이태준의 수필집이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하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를 담은 작품도 없지 않지만 상당수가 물 돌 바다 등 자연물을 소재로 담담한 소회를 풀어내고 있다. 문집의 제목이 ‘무서(無序)록’인 것을 보면 말 그대로 작가 자신의 두서 없는 생각을 모은 작품집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작품 하나하나에서는 예술가로서의 번뜩이는 재주를 엿볼 수 있다. ‘수선’이라는 작품의 경우, 추운 겨울 밤늦게 귀가해 식구들이 잠든 머리맡 문갑 위에 놓인 수선화 한 떨기와 대화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따뜻한 남쪽이 고향이라는 수선화에게 애처로운 감정을 느끼는 작가는 “너이(너의) 고향이 가고 싶으냐”고 묻고, 수선화가 새파란 하늘도 ‘부얼’(벌)도 없는 방 속에서 갇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 그건 내 운명”이라고 답한다. 그런 수선화를 작가는 자신의 단념할 수 없는 행복 때문에 겨울마다 사다 기를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면서 ‘민망한 일’이라고 규정하는 데서는 작가의 무한 상상력과 함께 솔직 담백한 그의 심성까지 읽을 수 있다.

수필은 그야말로 신변잡기의 소소한 장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읽는 맛을 느낄 수 있다. ‘무서록’에도 상허의 고상한 취미가 곳곳에 담겨있다. ‘매화’라는 작품에서는 북풍한설 내리는 한 겨울에 마당 가의 매화 나무를 바라보면서 ‘탐매(探梅)’하는 그의 유유자적한 시간을 그리고 있다. “국화를 능상(凌霜)이라 하나 매화의 고절(苦節)을 당치 못할 것이요”라고 읊조리는 대목에서는 조선시대 양반의 품격과 함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어떤 견결(堅決)함을 느낄 수 있다.

‘문장강화’가 글쓰기의 교본이라면 ‘무서록’은 문단에서 현대 수필문학의 백미로도 꼽힌다. 그런 줄도 모르고 월북작가의 작품이라는 묘한 호기심 때문에 집어 들었던 과거를 되돌아 보면 치기(稚氣)도 이런 치기가 없을 성싶다. 초년병 기자 시절 “월북작가의 작품인데 괜찮겠어요?”라면서 취재원으로 만난 공무원에게 ‘무서록’을 선물했을 때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짓던 장면도 새록새록하다.

김정곤 정치부장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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