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지개의 존재를 지지한다. 이 문장이 성립될 수만 있다면.

어제는 출강하고 있는 미술대학의 수업에서 1979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의 중요한 예술적 실천을 수행했던 ‘그룹 머티리얼’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이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미술관뿐만 아니라 길거리 상점, 버스와 지하철, 대형간판 등의 공공장소를 이용한 프로젝트를 만들었고 민주주의와 교육, 소외, 중남미 국가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 에이즈와 같은 첨예한 주제를 다뤘다.

동네 사람들에게 각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가져오게 한 ‘피플스 초이스(people’s choice)’도 인기를 누렸던 전시지만 가장 주목받은 것은 1989년에 기획한 ‘에이즈 타임라인(AIDS Timeline)’ 전일 것이다. 통계들과 도표, 기록사진과 영상, 다종다양한 설치물들을 통해 태만한 정부와 냉담한 언론이 얼마나 에이즈의 위기를 악화시켰는지, 그리고 지역공동체가 극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시각화한 이 전시는 미국 전역의 각기 다른 장소에서 열렸다. 당시 미국을 강타한 괴질이었던 에이즈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하고 그것을 사회ㆍ정치적인 문맥으로 엮은 연대기로 기획된 것이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인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는 이 ‘그룹 머티리얼’의 일원이었다.

재작년에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린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개인전 제목은 ‘더블(Double)’이다. 동성애자였던 작가는 에이즈로 사망한 그의 연인이자 동반자인 로스와의 사랑, 그의 부재와 상실을 다루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작가는 작품 안에서 성소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낸 것처럼 전시의 관객들도 그들의 권리를 인지하고 자신의 주관과 견해를 가지도록 격려한다.

전시 당시 서울 시내 여섯 곳의 대형 옥외 간판에는 이 연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텅 빈 침대가 찍힌 대형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동성애 반대에 열성인 한국의 극우 종교 단체의 항의가 있지 않을까 라는 우려가 무색하게 전시는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됐다. 연인의 죽음에 이어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또한 1996년에 에이즈로 사망했고 얄궂게도 그 해 에이즈칵테일 요법이 보급되며 비로소 HIV는 ‘관리 가능한 질병’이 됐다고 한다.

원인 모를 죽음의 공포와 그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사회적 편견, 차별에 맞서며 지난한 인정 투쟁을 벌여온 성소수자들의 역사에 대해 서울시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 금지’ 조항이 포함된 서울시민 인권헌장의 공표를 거부하는 퇴행적인 입장을 취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고 한 발언이 확인되면서 논쟁에 불을 지폈고 성소수자 단체들과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함께 서울시청에서 농성을 진행 중이다. ‘성적지향은 선천적인 성 정체성일 수도 있고 후천적인 관계의 결과’일 수도 있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내가 무지개의 존재를 지지할 수 없듯이 한 존재의 정체성은 누가 지지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직전에 고뇌에 찬 박 시장의 사과문은 발표됐지만 그가 글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서울시는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선포하는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다. 인권변호사였고 시민중심의 행정으로 큰 지지를 받았던 박 시장의 이런 발언은 쉽사리 차기 대권을 위한 정치적 판단으로 해석됐다.

이것이 얼마큼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진보적 인사들이 서로 시원한 입담을 자랑했던 ‘나꼼수’를 들으면서도 심적인 불편함을 토로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우리 편’의 선거 승리를 위해 기존 정치인들이 행해왔던 구태의연한 담합을 그대로 답습하는 태도가 여전히 그들에게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식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대의를 위해 현재의 존재 자체를 타협해야 한다면 그 대의란 어떠한 차별성을 가질 수 있겠나. 이번 박 시장과 그의 행보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말은 그것이다. 해야 마땅한 일이라면 ‘대’의와 ‘거’사를 위한 눈치를 보지 말고 그냥 지금 그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정민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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