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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흑막(黑幕)

입력
2014.12.1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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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일본어에서 같은 한자어가 같은 뜻으로 쓰이는 예가 많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일 때도 적잖다. 좋은 예가 ‘흑막(黑幕)’과 ‘구로마쿠(黑幕)’이다. 검은 장막이란 원래의 뜻은 같다. 그러나 확장된 의미로는 완전히 딴판이다. 우리말 ‘흑막’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음흉한 내막’을 가리키지만 일본어 ‘구로마쿠’는 ‘배후에 숨어서 사태를 장악, 조정하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막후 실세’나 ‘배후 조종자’쯤의 뜻이다. 양국의 서로 다른 문화전통이 이런 차이의 배경이다.

▦ 일본 만화나 드라마에는 ‘구로마쿠’가 자주 등장한다.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의 모습이다. 일반인들은 그의 존재와 영향력을 모르지만, 거물급 정치인들이 집에 드나들고, 각료 인선은 물론이고 차기 총리까지 안방에서 내정된다. 노인은 여야 다툼이나 여당 계파 사이의 갈등도 매끄럽게 풀어낸다. 언론의 보도 방향까지도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예측하고 언제든 필요한 쪽으로 이끈다. 재계에도 시장의 경쟁구도를 흔들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돈과 정보력이 힘의 원천이다.

▦ 허구 특유의 과장을 실제로 닮은 인물이 있었다. ‘록히드 사건’으로 진면목 일부가 드러난 A급 전범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가 대표적이다. 막강한 권력자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까지 쥐고 흔들었다. 군부와 결탁한 군수물자 조달로 거금을 챙겼고, 자민당 모태인 자유당 결성 등에 수시로 관여해 거액의 정치자금을 뿌렸다. 미 중앙정보국(CIA)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 정황 증거도 숱했지만 끝내 역사 속에 묻혔다. 8년 동안 병원에 드러누워 구속 수감과 국회 청문회 출석을 피했고, 최종 판결 직전 숨졌다.

▦ 이런 막후 거물의 존재는 내각책임제 권력구조와 자민당 계파 정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통령에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라가 떠들썩한 ‘정윤회 문건’ 논란을 통해 ‘권력갈등’이나 ‘비선 실세’ 같은 말을 자주 듣는다.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한 주변 인물들의 편싸움이나 호가호위(狐假虎威)에 붙이기에는 너무 거창하다. 그나저나 문체부 국ㆍ과장 경질이나 문건 작성ㆍ유출 경위 등의 흑막은 언제쯤이나 벗겨질까.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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