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雪山)에 오른다. 충남 홍성 용봉산. 눈 내리니 우뚝한 바위산의 산세가 순해진 듯 보인다. 헐벗은 나목에 화사한 눈꽃 피니 고상한 멋이 봄 못지않다. 능선에서 눈 덮인 들판 굽어보니 하얀 융단 깔린 별천지다. 볼수록 눈 맑아지고 마음도 순백이 된다. 이 마음으로 세상 보니 천지사방에 사랑하지 못할 것이 없다. 겨울 되면 눈 덮인 산에 올라본다. 궂은 길 차분히 짚어 꼭대기에 오르면 여느 계절에 경험 못할 큰 기운 느끼게 된다. 춥고 긴 세속의 겨울 버틸 힘도 덩달아 생긴다. 오랫동안 설산 동경했다면 이번에 시도한다. 용봉산, 그리 높지 않다.
● 자연의 예술품 부려진 ‘내포의 금강산’
용봉산자연휴양림 찾아간다. 홍북면 상하리에 있다. 사람들이 산행 출발점으로 주로 삼는 곳이다. 용봉사, 병풍바위, 악귀봉, 노적봉, 최고봉 거쳐 이 지역 태생인 고려의 최영 장군이 활을 쐈다고 전하는 활터를 지나 휴양림으로 하산하거나 최고봉에서 투석봉 지나 용봉초등학교로 내려오는 종주코스를 택한다. 거꾸로 가도 상관없다.
용봉산, 매력 덩어리다. 발 들여놓기 전에 범상치 않은 몸체에 눈이 먼저 놀란다. 이런 산, 흔치 않다. 휴양림 들머리에서 산을 올려다보면 알게 된다. 대폭발에도 끄덕 않을 것 같은 바위산의 모습이 이토록 당당하다. 정상인 최고봉 높이가 불과 381m. 높지 않지만 산세는 거침없다. 능선 곳곳에 솟은 암봉의 등등함이 고산준봉 못지않다. 큰 산 같은 험준함이 용과 봉황의 움직임 닮았다. 그래서 ‘용봉(龍鳳)’이다. 하나만 있어도 예사롭지 않은데 둘이 함께 있다. 과유불급이라 했지만 예외가 여기 있었다. 더해지니 눈이 두 배로 호강한다. 산 좋아하는 사람들, 이 모습에 반해 ‘미니 금강산’이란 애칭을 붙여 놓았다. 눈 내리니 산은 더 전설 같다.
산에 들면 대단한 위엄이 사라지고 대신 은근한 재미가 솟는다. 종주하려면 너댓개의 봉우리를 타고 넘어야 한다. 등에 땀이 난다 싶을 때 조붓한 숲길이 나타나고, 판판한 능선길이 지겹다 싶을 때 바위봉우리가 느닷없이 등장한다. 변화무쌍하니 지루할 틈이 없다. 산이 살아있다.
여기에 봉우리 주변마다 부려진 기암들은 산행의 흥을 더욱 돋운다. 용봉사 지나 만나는 병풍바위는 설악산 울산바위의 축소판이다. 이 위에 놓인 의자바위는 곧 떨어질 듯 아슬아슬 위태롭다. 거대한 용바위 지나 악귀봉 뒤로 돌아가면 산을 타고 오르는 두꺼비바위가 나타나고, 노적봉 뒤에는 웅장한 사자바위가 숨어있다. 최고봉 아래에 도착하면 하늘로 뻗은 솟대바위가 반긴다. 나타나는 바위마다 볼거리니 잊지 말고 챙긴다. 돈 주고도 못 볼, 솜씨 좋은 자연의 조각품이다. 하나씩 짚어 가면 숨 가쁠 틈이 없다. 내친김에 멋진 바위 하나 ‘콕’ 찍어 멋대로 이름 하나 붙여본다. 퍽퍽한 일상 벗어나, 주인 없는 산에서 누리는 호사도 나쁘지 않다. 봉우리 하나씩 넘을 때 마다 발 아래에는 내포지방의 들판이 펼쳐진다. 장쾌하고 또 시원하다. 바다가 육지 안으로 휘어 들어간 지형이 내포. 충남 서북부의 홍성, 예산, 당진, 서산, 보령 등이 이에 해당한다. 홍성은 조선시대 홍주목이 있었던 곳으로 내포의 중심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추가하면, 약 4시간 걸리는 종주코스를 비롯해 짧게는 30분짜리 코스까지 다양한 등산로가 조성돼 있다는 점이다. 이러니 체력과 날씨에 맞춰 산행 즐길 수 있다. 눈 내린 날에 휴양림까지만 산책해도 좋고 백제의 고찰인 용봉사와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까지 이어진 등산로를 짚어가도 고즈넉한 운치를 느낄 수 있다. 누구든지 쉽고 지루하지 않게 자연과 놀 수 있는 곳이 용봉산이다.
마여여래입상은 꼭 알현한다. 종주코스를 따라가더라도 잠깐 본다. 바위 앞면에 새긴 고려 때의 불상인데 잔잔한 미소 머금은 인상이 참 온화하고 전체적인 균형도 잘 잡힌 보물(355호)이다. 미소 마주하고 서면 한기에 얼어붙은 마음이 절로 녹는다. 한해 잘 버텼고, 다가올 한해 또 잘 견디게 해 달라고 두 손 모으고 기도 해본다. 용바위 지나면 종주코스 옆으로 용봉사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나타난다. 이 길 따라 200m만 내려가면 볼 수 있다. 10분이면 된다.
용봉초등학교 못 미쳐 있는 석불사(옛 용도사)에도 독특한 석불 하나 있다. 홍성 상하리 미륵불이다. 역시 자연 암석에 새긴 고려 때의 불상인데 평평한 얼굴에 드리운 부드러운 미소가 어찌나 친근하고 온화한지 보기만 해도 정이 간다. 하얀 눈을 이고 있으니 더 익살스럽다. 나중에 중생을 구제하러 세상에 온다는 미륵불인데, 마주하면서 겨울 한기 잊어버렸으니 이미 한 중생이 구제 받았다.
석불사에서 용봉폭포를 거쳐 처음 출발했던 휴양림까지 가는 임도가 있다. 겨울에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다. 대신 용봉초등학교에서 휴양림까지 이어진 ‘내포문화숲길’을 따라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초등학교 옆으로 난 ‘용봉3길’로 들어서서 상산마을, 하산마을 차레로 지나면 휴양림 들머리다. 약 2km. 30~40분이면 닿는다. 한갓진 마을 가로질러, 용봉산 보며 걷는 길이다.
● 곰삭은 시간의 향기 오롯한 성곽, 눈 내린 포구의 고즈넉한 정취
눈 내린 홍주성도 구경한다. 고즈넉한 정취가 제법이다. 조선시대 홍주목 관아를 중심으로 쌓은 읍성인데 지금의 홍성군청 인근에 남쪽 성벽 일부와 몇몇 건물들이 남았다. 성벽 따라 난 길을 걸으며 바람에 실려 오는 곰삭은 시간의 향기 음미한다. 가슴 먹먹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시나브로 잊힌다. 홍주목사(牧使)가 휴식을 취하던 후정의 정자 여하정과 집무를 보던 안회당도 찾아본다. 안회당의 바깥문이었던 홍주아문은 현재 홍성군청의 정문으로 사용되니 볼수록 독특하다. 홍성 시내 한복판에 있는 조양문은 읍성의 동문이다. 힘찬 필치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썼다. 대한제국 말기에 서문, 남문, 북문은 일본인에 의해 파괴됐는데 조양문은 주민들의 반대로 보존됐다. 시간이 뒤섞인 풍경인데, 혼란스럽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다.
해질 무렵에는 궁리포구(궁리항)에 들러본다. 천수만 끼고 있는 서부면에 위치한 작은 포구다. 일몰 명소로 입소문 타는 곳이다. 연말이 되면 해넘이 구경 인파로 북적거릴 곳이지만 조금 일찍 찾으니 한갓지다. 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의 겨울 정취가 푸근하고, 활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해안선도 참 예쁘다. 바다와 육지가 맞닿은 곳에 언덕 하나 바다로 튀어나와 여백을 메우니 꼭 해질 무렵 아니어도 운치가 그만이다. 해안으로 산책로 잘 만들어져 있으니 걷고 싶은 만큼 걸어본다. 바닷바람 힘껏 들이켜면 먹먹한 가슴이 뻥 뚫린다.
날씨 흐려서 해넘이 보지 못해도 실망할 필요 없다. 찬바람 속에 따온 굴을 손질하는 촌부의 모습이 붉은 노을보다 백배는 더 아름다우니까.
바람은 차가운데 홍성의 산과 바다는 볼수록 따뜻하다.
●여행메모
서해안고속도로 당진분기점에서 당진영덕고속도로 탄 후 고덕IC로 나와 622번 지방도 타고 충남도청 방면으로 간다. 도청 옆이 용봉산자연휴양림이다.
용봉산 산행 코스는 다양하다. 휴양림 들머리 구룡대 매표소→용봉사→병풍바위→용바위→악귀봉→노적봉→최고봉(정상)→투석봉→석불사→용봉초등학교로 이어지는 코스(3.4km, 약 2시간 30분)가 주로 이용된다. 용봉초등학교에서 휴양림 들머리까지 시내버스가 다닌다. ‘내포문화숲길’을 따라 걸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와도 괜찮다. 2km로 약 30~40분 거리다. 이 외에 구룡대 매표소→용봉사→병풍바위→용바위→악귀봉→노적봉→최고봉(정상)→최영장군활터→휴양림관리소→구룡대 매표소로 돌아오는 코스(약 2.9km, 약 2시간)도 산행하기 적당하다. 단 눈이 많이 내리면 최영장군활터로 하산하는 길이 위험하니 마애여래입상, 용봉사를 거쳐 내려오는 것이 안전하다. 용봉산은 바위산이라 눈이 내리거나 많이 쌓였을 경우 아이젠 등 겨울산행 장비는 필수로 챙겨야 한다. 용봉산 휴양림 들머리에 음식점들이 있다. 용봉산자연휴양림 (041)633-1783
용봉산에서 홍주성까지 차로 약 10분, 홍주읍성에서 궁리포구까지 차로 약 30분 거리다. 홍주성에서는 홍성온천이 가깝다.
홍성=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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