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은 상품 중 하나가 ‘셀카봉’이라는데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자유자재로 길이 조정이 가능한 막대를 들고 환한 웃음꽃을 피우는 시민들을 거리 곳곳에서 심심찮게 보게 된다. 국내외 여행길에 오른 이들 뿐 아니라 정겹게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나 삼삼오오 모인 지인들끼리의 술자리에서도 ‘인증샷’을 날리는 모습은 ‘문명국가’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새로운 풍속 같은 일상이 됐다. 무엇보다 인구대비 카메라 보급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분석에 걸맞게(?) 봇물 터지듯 밀려든 새로운 사회현상에 뒤늦게 눈을 뜬 나에게는 몹시 흥미로운 일이다.
왜들 그리 지금 자신의 모습을 남기는 것에 커다란 재미를 느끼는 걸까. 아프거나 슬픈 순간이나 표정이 아닌 환한 미소를 머금은 바로 그 순간을 말이다. 어느 누구든 온전히 행복한 ‘기억’들만 갖게 되기를 소망한다. 당연히 그 기억의 원천이자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억들을 근거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며 우리는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인생 여정의 사이사이 마다 한두 장의 사진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결국 자신의 기억을 증명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도구임에 틀림 없다. 사진행위에 수많은 철학적 담론들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지금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을 드러내길 원한다. 아니, 확인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NGO 자원활동가로 캄보디아에 머물던 몇 해 전 나의 주된 일과는 도시 빈민촌과 시골 오지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무료로 사진을 찍어 주는 일이었다. ‘달팽이사진관’이라 명명한 이 활동으로 수천여 명의 ‘얼굴’들과 마주했던 기억이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들 대부분은 아주 가난하거나 생계를 연명하기에 힘겨운 일자리를 가졌고 더러는 지뢰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잃은 이들이었다. 처음엔 현실의 고단함에 치인 그들의 얼굴을 과연 제대로 찍을 수나 있을지 두려운 마음이 컸다. 그러나 그들의 삶 안에 들어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그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동정의 대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가난하지만 물질자본에 매달리지만은 않는 그들의 순진무구한 눈동자 안에는 내가 놓치거나 잃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도 그것을 보는 맛에 두루 여기저기를 다니며 사람들의 얼굴과 마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빈민촌이나 오지마을에 들어가면 미리 주변풍경부터 눈과 가슴에 담는다. 그렇게 시간을 두어 주민들과의 낯을 나누고 나서야 자연스럽게 한분 두분 카메라에 얼굴을 담게 된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즉석 인화기에서 연신 쉬잉 소리를 내며 나오는 사진들을 보며 빨리 자기 차례가 오라고 아우성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쑥스러운 듯 살짝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다시 웃어준다. 그들의 남루한 옷차림에서 묻어나는 가난은 어느새 밀려든 친밀감에 뒤로 물러나고 서로 ‘바라보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를 든 손이 누구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듯싶다. 경제적인 여유로 카메라를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긍정적인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사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질 수 있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사진 한 컷은 단지 종이 한 장에 담긴 이미지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사회적 주류문화가 된 셀카 열풍은 결국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행위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이에 안도감을 느끼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된 것이 아닐까. 다만 한 가지는 염려스럽다. 경쟁구도의 일상에 치인 현대 도시인들이 ‘남’이나 ‘우리’를 보는 감각마저 덩달아 잃고 오직 자기만을 보게 되지는 않을지. 어느새 이타적인 시선이 무엇인지를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잠시 ‘셀카놀이’를 멈추고 한두 번쯤은 다른 삶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보자.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이 도처에 널려있으니.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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